한줄 詩

그림자의 변명 - 우혁

마루안 2022. 6. 1. 22:24

 

 

그림자의 변명 - 우혁

 

 

조금 덥다 싶은 날이면

허투루 흩어놓은 듯한 철자들을

찾아보아요

성급할 것도 없는

오후, 오전부터 쌓인 별은

자신의 퇴적층에서 당신의 눈을

화석처럼 발견하곤 할 거예요

 

눈물을 닦으라던 닦으라고 애원하던

오래된 노랫말은

'무엇인가 꽉 찬' 지면 위에

라벨처럼 붙어 있어요

그러다 당신은 무심결에

툭 치고 지나가기도 해요

 

몸 바뀐 그림자

난 사랑을 그렇게 부르곤 했어요

없음에 대한 기록들

있어 본 적이 없는 운명들을

종종 잘못된 발음으로

발화해요

괜찮아요

오자를 찾는 일이 아니에요

있어달라는 애원이었죠

이럴 때 흘리는 눈물은

제법 알 굵은 호박색이랍니다

 

 

*시집/ 오늘은 밤이 온다/ 삶창

 

 

 

 

 

 

바람 - 우혁

-몸 밖의 모든 것은 푸르다

 

 

돌아올 때는 언제일지 몰라도

돌아올 곳은 여기밖에 없네

눈물은 삼킬 때만 의미 있지

흐르는 것들은

이제 다른 이름으로 멀어지거든

바람이라고 쉽게 말할까

세상의 끝에서 처음으로

아무것도 아닌

몸을 밀어내는 것

다른 누군가를 끌어안고

흩어지는 것

흐른 눈물이 떨어질 틈도 없이

말라붙은

윤곽을 따라

흔적 밖으로 자리를 만들지

태어나서 오직

바람만 말할 수 있다는

아이

흔들리며 자라네

 

 

 

 

# 우혁 시인은 1970년 서울 출생으로 한국외대 인도어과를 졸업했다. 2002년 <미네르바>로 등단했다. <오늘은 밤이 온다>가 첫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