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흉한 꿈을 꾸다 깬 저녁 - 심재휘

마루안 2022. 3. 31. 19:33

 

 

흉한 꿈을 꾸다 깬 저녁 - 심재휘

 

 

마루에 오후의 봄볕을 깔고 그 위에 담요 한장을 더 깔고

엎드려 턱 괴고 바깥을 보면서 잠이 든 모양이다

 

흉한 꿈을 꾸다가 깨어보니 어느덧 몸이 식은 저녁

돌아가시기 전에 속이 안 좋던 아버지는

식은 밥을 뜨거운 물에 말아 드셨다

 

무엇을 할 수도 없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해 질 녘에는

내 등을 두툼하게 덮어주다가 기울다가

인사도 없이 떠난 햇살이 너무 멀고

흉한 꿈속의 사람은 노을 전 서편처럼 붉게 피었다 진다

 

삼월의 빈집은 겨울보다 더 추운 계절

동네 아이들 노는 소리가 왁자한 저녁에

차가워진 배를 문지르면 배는 이내

뜨신 물속의 식은 밥처럼 온기가 돌고

배 속 먼 곳은 손이 닿지 않아서 여전히 차고

자다 깬 저녁은 금세 어두워진다

 

 

*시집/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창비

 

 

 

 

 

 

높은 봄 버스 - 심재휘

 

 

계단을 들고 오는 삼월이 있어서 몇걸음 올랐을 뿐인데 버스는 높고 버스는 간다 차창 밖에서 가로수 잎이 돋는 높이 누군가의 마당을 내려다보는 높이 버스가 땀땀이 설 때마다 창밖으로 봄의 느른한 봉제선이 만져진다 어느 마당에서는 곧 풀려나갈 것 같은 실밥처럼 목련이 진다 다시없는 치수의 옷 하나가 해지고 있다

 

신호등 앞에 버스가 선 시간은 짧고 꽃이 지는 마당은 넓고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그다음 가사가 생각나지 않아서 휘날리지도 못하고 목련이 진다 빈 마당에 지는 목숨을 뭐라 부를 만한 말이 내게는 없으니 목련은 말없이 지고 나는 누군가에게 줄 수 없도록 높은 봄 버스 하나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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