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지 마, 라고 네가 말할 때 - 강문숙
한 사흘 대답 없던 톡에
깨알 숫자 사라지고 댓글 뜬다
주말엔 폰을 아예 책상 서랍에 넣고 지내
일찍 난로를 꺼 버린 탓에
감기가 왔나 봐
이제 난 좀 괜찮아졌지만
걱정했을 네가 더 걱정이야
너는 아프지 마
아프지 마, 라는 말 참 아프게 다정한 말
봄꽃 피려다가 꽃샘바람에 움츠러들 때
가는 입술 벌려 봄볕 받아먹고 있던
저 나뭇가지를 꺾어서 쓰는 말
어떤 색으로 피어날지 알면서도
난생 처음 본 색깔인 양 신기한 꽃잎 속
하얀 입김 같은 말
말에도 온도가 있어 느린 게이지 곡선으로 끌어올리다
노을 같은 발음으로 아프지 마, 네가 말할 때
아프다가도 나는 안 아프고 그래서 더 아프고
*시집/ 나비,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천년의시작
모로 눕다 - 강문숙
따스하게 뎁혀진 동굴 속으로 파고든다 반듯하게 등을 대고 누우면 누구에겐가 미안해지는 밤 그녀는 모로 눕는다, 내장들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출렁거린다 하루 종일 켜켜로 쟁여 두었던 물기를 당기는 순간이다
모로 눕는다는 것은, 지친 몸을 겸손히 접어서 밤에게 바치는 제물이 되어도 좋겠다는 것 속죄하는 어린양처럼 가지런히 모은 두 다리 사이로 뜨거운 것이 흘러 강가에 다다랐을 때 강물에 쓸려 가던 검은 돌들이 몸을 어루만지고 싶다는 것
일생을 이렇게 착착 접어 두었다가, 어느 날 미라를 발굴하는 낯선 손바닥의 온기를 느낄 것만도 같은 울다가 잠이 들었는지 짓무른 눈가에 싹이 돋아날 것도 같은 한 오백 년 전의 몸이여, 잠들기 전에 뒤척이다가 끝내 모로 눕고 마는 저 지극한 호모 사피엔스의 생각하는 자세여
# 강문숙 시인은 199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1993년 <작가세계> 신인상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잠그는 것들의 방향은?>, <탁자 위의 사막>, <따뜻한 종이컵>, <신비한 저녁이 오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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