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달가락지 - 육근상

마루안 2022. 1. 15. 21:39

 

 

달가락지 - 육근상

 


유품 정리하는데 흔한 금붙이 하나 나오지 않는다
자랑이라고는 웃을 때 살짝 보이는 어금니 금이빨이 전부였는데
그것도 몇 해 전 틀니로 갈아 끼워 오물오물 평박골 만드셨다

팔순에 손녀가 선물한 화장품도 새것으로 보아

바라만 보고 흡족해하셨나 보다

쪼그리고 앉아 호미질하는 것 좋아하시더니

꽃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었을까

귀퉁배기 깨진 밥그릇에 심은 꽃잔디가 마루까지 뻗어 있다


헌 옷가지며 먹다 남은 약봉지 태우다 물끄러미 장꽝 바라보니
남루를 기워 입어 한껏 차오른 달이 가락지인 양
고욤나무 빈 가지에 걸려 빠지지 않는다
무르팍에 얼마나 문질렀는지 반질반질하다

 

 

*시집/ 여우/ 솔출판사

 

 

 

 

 

 

여우 - 육근상


정월은 여우 출몰 잦은 달이라서 깊게 가라앉아 있다
저녁 참지 못한 대숲이 꼬리 흔들며 언덕 넘어가자
컹컹 개 짖는 소리 담장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런 날 새벽에는 여우가 마당 한 바퀴 돌고
털갈이하듯 몸 털어 장독대 모여들기 시작하지
배가 나와 걱정인 장독은 옹기종기 숨만 쉬고 있었을지 몰라
여우는 골똘하게 새벽 기다리다
고욤나무 가지에도 신발 가지런한 댓돌에도
고리짝 두 개 서 있는 대청까지 들어와
바람을 토굴처럼 열어 세상 엿보고 있다

나는 칼바람 몰아치는 정월이면
문풍지 우는 소리 견디지 못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럴 때마다 화진포에서 왔다는 노파가 간자미회 버무려주는 집에서
며칠이고 머물다 돌아오곤 하였다

소나무가 한쪽 팔 잃고 먼 산 바라보는 것은
밤새 여우가 길 내어 올라간 북방 그리워하는 것
나는 북방 사내인 듯 여우 지나간 길 한참 바라보다
새벽밥 툭툭 털고 일어나 마당 나서면
흰 털 보송보송한 여우가 뽀드득뽀드득 소리 내어 따라왔다

오늘처럼 솜눈이 푹푹 날리는 날이면
나는 어디를 급히 다녀와야 할 사람처럼
고욤나무 아래에서 여린 가지 바람 타는 소리로
꼬리만 남은 강변길 우두커니 바라본다
대숲도 따라나서고 싶은지
여우 지나간 길 흰 그림자 내어 굽어보고 있다

 

 

 

# 육근상 시인은 1960년 대전 출생으로 1991년 <삶의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절창>, <만개>, <우술 필담>, <여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