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우주를 만지다 - 홍성식

마루안 2022. 1. 16. 19:32

 

 

우주를 만지다 - 홍성식

 

 

자정 넘긴 지하 술집

스물둘 생일을 맞았다는

여급의 조그만 젖꼭지를 만지작거린다

 

태초의 혼돈이 이처럼 말랑말랑할까

닳은 지문 아래 깨어나는 옛날

검지와 엄지가 우주를 기억해냈다

 

알려주지 않은 것을 알아버린 죄

젖꼭지 혹은, 우주 앞에 허물어지고

멀리 있는 것들만 취기 없이도 행복하다

 

말캉거리며 피어나는 꽃들

꽃판에 그려진 적두색 유채화가

해독불가 우주의 비밀스러움과 닮았다

 

소유할 수 없는 이름 탓에 떠돈 생

기억되는 사건은 왜 남루할 뿐인지

다시 젖꼭지를 비틀며 우주를 만진다

 

되돌릴 수 있다면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지도 없이 오래도록 멀리 떠돌았다

 

젖꼭지가 흐느낀다

우주가 운다

만질수록 비밀스러워지는 것들이 흐느껴 운다.

 

 

*시집/ 출생의 비밀/ 도서출판 b

 

 

 

 

 

 

저 좁은 창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은 - 홍성식


슬리퍼 신고 동네 통닭집에 앉은 사내
지저분한 수염에 기름 묻히며
날개 뼈를 씹고 오독오독 빠득빠득
경멸의 눈길로 돌아보는 젊은 연인 한 쌍
허술한 삶은 습해서 막막하게 어둡다

먼지 낀 가게 창 너머 열두 평 빌라
희미한 백열등 불빛이 조그만 창을 넘고
마침내 터무니없는 희망 넘실넘실 출렁출렁
견뎌온 세월 돌아보면 절로 고이는 눈물
옹색한 저 집엔 누가 살고 있을까

꿈은 멀고 청춘은 흔적 없이 사라져
마주 앉을 술친구 하나 없는데
슬픔만이 살아남아 글썽글썽 울렁울렁
단 한 번 입맞춤에 전 생애를 걸던 사내
낯설고도 낯익은 그는 누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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