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13월의 달력 - 임경남

마루안 2021. 12. 29. 21:48

 

 

13월의 달력 - 임경남

 

 

더는 갈 데가 없는 13월의 달력은 냉골이다

일마저 끊긴 겨울에는 말이 입안으로 말려들어가

목소리까지 증발해버린다

나는 수취인불명

 

식은 텔레비전은 혼자 놀고

전화기는 손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인기척이 졸아든 집에 행주는 비틀린 채 말라가고

달력의 표정은 똑같다

 

오래 전에 탕진해버린 젊은 날

파산한 추억은 검은 비닐봉지 안에서 납작하고

흔들리며 가는 독거는 갈아입을 감정이 없다

어떤 부호도 와서 같이 살지 않은 탓이다

 

누구에게도 번지지 못하고 봉지처럼 캄캄해지느라

희망의 패를 놓친 사적인 백산빌라는

한 켤레의 어둠을 신고

끈질기에 나를 찾아오는 것인데

 

 

*시집/ 기압골의 서쪽은 맑거나 맛있거나/ 북인

 

 

 

 

 

 

이명(耳鳴) - 임경남

 

 

이명은 빵 속에 빵이 사라진 난처함이다

뿌리는 어디에 걸어두었는지 나비가 걸어와

꽃가루 잔뜩 묻은 발목을 내 귀에 털어넣는다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으로 들려오는 바닷가

소라껍데기 안에는 파도 소리만 있고 내 귀 안에는 나비 소리만 있다

공갈빵 같은 저녁

바다와 나비는 소리만 벗어두고 어디로 간 걸까

 

맹렬하게 내가 걸어놓은 주술이 볼륨을 높이며 온다

나비 소리 하나가 나를 먹어치우는 밤

고요가 넘치면 소란이 되는가

길고양이가 핥아놓은 새벽 두 시의 긴 꼬리를 잡고

나는 꽃잎처럼 다물어지지 않는 소리를 파내는 중이다

 

당신에게 딴 여자가 생겼다는 소문이 턱밑까지 쫓아온 날

전화기는 당신을 찾아내지 못하고

나비 한 마리 날아와 내 귓속에 깊은 동굴을 팠던 것인데

 

충혈된 내 귀속의 소리를 먹고 자라나는 나비는

파지만 수북이 만들었다

어깨를 짚고 건너오는 풍문이 날로 살찌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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