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예약된 마지막 환자 - 이윤설

마루안 2021. 11. 17. 22:23

 

 

예약된 마지막 환자 - 이윤설


나의 병은 주치의의 주특기, 삼십 년째 이 원인 모를 난치병을
연구했고 당연히 국내 유일한 권위자로 성장했다
그에게 나는 오늘 혼이 났다
먹어서는 안 될 사슴뿔 고아 짠 용을
남몰래 복용했기에
그의 예단대로 통증은 격심했고
불면은 깨진 유리처럼 저항력을 손상시켰다
두 손을 모아쥐고 머리를 조아리며
의사의 말을 따르지 않는 환자는 치료할 수 없다는 극단의 처방을
거두시기를 앙망하느라
내 눈자위가 떨잠처럼 으달달 떨렸다

차트를 갈겨쓰는
창백한 흰 가운의 그는
환자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법이 없다
나는 소독된 햇빛이 비치는 책상 위
모형 범선을 보고 있었다
펜을 멈추지 않은 채 그는 말했다
제 의료 인생은 선원들과 함께한
험난한 항해와도 같았죠 닻을 내리기 전까지
무엇보다 선원들과 싸워야 합니다

휘날리는 필기가 끝나고 마침내 새 처방이 나왔다
여명시에 깨어나 땀에 흠뻑 젖도록 일하고
일몰시에는 가족과 함께 영양이 풍부한 저녁식사를 한 뒤
시를 읽다가 잠들어야 합니다

그건 좀 어려워요 직업이나 식사 무엇 하나
규칙이긴 힘든데다 고독한 처지예요
더구나 시는 읽을 줄 몰라요

건강을 돌보라는
간단한 충고조차 들으려 하지 않는군
그는 깨진 유리처럼 인상을 쓰고
잠시 관자놀이를 짚었다
간호사기 황급히 물잔과 알약을 대령하자
약을 털어 삼키는 동안
시꺼멓게 반달진 그의 눈 밑이 엿보였다

자가면역질환은 우리 몸이 자신의 세포를 적으로
오인하고 스스로를 공격하여 생기는 통증이지요
나는 환자들을 내 몸처럼 여겨요 그런데 왜!
처음으로 마주친 그의 눈동자가 으달달 떨며
폭죽처럼 실핏줄이 터졌다

선생님, 통증이 심하신가요?
그는 두 손을 모아쥐고 간절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슴뿔 고아 짠 용을 복용하셨나요?
그는 그건 이미 십 년 전 일이라고 못박았다
나는, 여명시에 깨어나 땀에 흠뻑 젖도록 일하고
일몰시에는 가족과 함께 영양이 풍부한 저녁식사를 한 뒤
시를 읽다가 잠들어야 한다고 처방했다

그는 직업상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나는 내 말을 믿지 않는 환자는 진찰할 수 없다고 소리쳤다
그는 고개를 떨구었고
나는 간호사에게 외쳤다
다음 환자!
그는 흰 가운에 청진기를 건 채 훌쩍이며 문을 열고 나갔다
간호사는 그가 예약된 마지막 환자였다고 말했다

*시집/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 문학동네

 

 

 

 

 

 

일생 - 이윤설


하려던 복수도 떠나버리고
그토록 다르던 너희들과 함께 같은 침대에 누워
기다리던 사람이 오지 않는 것도 상관없는 또 알뜰히 지워지는 하룻잠을
당신에게 청하여본다
심각한 얼굴은 마라 말도 말아라 꿈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 심야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래놓고도 울리는 벨소리가 핏줄처럼 질긴 건
못할 복수로나마 나를 청하는 걸 안다
나를 기다리다 너희들이 되고 너희들은 있지도 않은 나를 요청하여
누구로서도 풀지 못할 사나운 꿈자리가 되는 걸 안다
그래 알기를 원했던 건 오직 내가 올 것인가 와서 너희들과 더불어
지금 없는 나를 낳아주는 거였다
당신이 나를 놓아주는 거였다
일생이 다 떠나버리고
문설주에 기대 앉은 먼지에게 나를 입혀주는 것이었다
내가 와서, 하지 못한 일생 동안의 복수를
당신의 이름으로 사하여주는 것이었다
와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렇다고 해야 하는 것이었다
일생

 

 

 

 

# 이윤설 시인은 1969년 경기도 이천 출생으로 명지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이 당선되었고, 2006년 조선일보와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다. 2020년 10월 10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는그의 첫 시집이자 1주기에 맞춰 나온 유고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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