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묘비명에 대한 답신 - 우대식

마루안 2021. 11. 17. 22:02

 

 

묘비명에 대한 답신 - 우대식

 

 

칸트의 길을 걷는다

오후 3시 30분 정확한 시간에 느릅나무 아래를 지나

문이 닫힌 카페 앞 노천에서 담배를 피워 문다

아직 지팡이를 쥘 나이는 아니다

바쁜 사람들이 지나가지만 나는 그들을 보고 있지 않다

생각과 싸우는 사람

지금까지 모든 생각을 불태울 수 없을까

신의 증명이라는 정거장 앞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아닌 척했지만 늘 사소한 불안함에 모든 것을 망치곤 하였다

칸트의 묘비명은 맑고도 슬프다

그가 경이롭게 생각했던 것은 별과 도덕 법칙이었겠지만

나를 채찍질한 것은 그 앞의 전제일 뿐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떤 고독 같은 것으로 인해

설명할 수 없는 괴로움과 달콤함에 취해 살아왔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무언가 어긋났다는 내용의 편지를 쓸 수밖에 없다

칸트에게 저녁밥은 없었다

그가 어떤 주의자였다는 것은 상관없다

저녁밥이 없다는 것은 무한한 공허 혹은 열림이 아니었을까

그가 별을 그토록 경이롭게 바라보았던 것도

저녁을 먹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저녁이라고 말할 때 이녁 너머 피안이 떠오른다

생명으로의 집착이 칸트로 하여금 저녁을 피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살고 싶다

생각이 너덜너덜해진 인간으로

괜히 눈물이 난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시집/ 베두인의 물방울/ 여우난골

 

 

 

 

 

 

이순(耳順) - 우대식


이제 묵념 따위가 매우 잘된다
어떤 형식도 괜찮다
벌써 귀가 순해지는지 부끄럽기도 하지만
하나님이나 부처님 이런 분들도 크게 나무랄 것 같지는 않다
내친김에 봄날 꽃나무와도 한번 크게 겨루어보고 싶다
몇 합 겨루지 못하고
낙화의 황홀에 굴복할지라도
내 안에 뻗은 칼로 된 나뭇가지와 꽃잎도
쨍그렁 쨍그렁
낙화의 종년(終年)을 맞고 싶다
봄비에 붉은 녹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는
내 안의 꽃들이여
순백의 어느 한 날을
우리도 그리워하지 않았겠는가
귀가 순해진다
내 귀를 잘라내고 싶다

 

 

 

 

 

*시인의 말

오랫동안 신(神)에 대해 생각했다
당신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 육신으로 빚을 갚았으니
남은 생은
땅 위에서 살겠다
진창에서 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