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나무 숲을 걸으며 - 박남원
누가 뭐래도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어야 했는데
돌이켜보면 내 인생은
부질없이 허비한 곳이 너무 많았다.
잔가지는 흔들려도 뿌리까지는 내주지 않는,
때가 되면 초록에 감춰둔 빛깔들을 열어 강물처럼 유유히 흘려보내는,
저 현현한 붉은 잎들의 복자기나무들처럼
묵묵히 시간을 견디며 수액을 나르고 나이테를 쌓았더라면
어느덧 나 또한 저 황홀한 계절의 일부가 되지 않았겠는가.
인생의 외길에 남아 나는 긴 한숨을 내쉬네.
살면서 세상의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고 말았을 때
나무들은 결코 제 속까지 흔들리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뿌리는 땅속 깊이 묻어두고 비바람 속에서도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것을
세월이 많이 지나고 난 후에야 나는 비로소 깨닫네.
내 안의 사소한 돌부리에도 쉬 길을 놓치기 일쑤이던, 지푸라기처럼 지나가 버린 무수한 날들.
그 많던 기회의 날들은 이제 내게는 남아있지 않네.
내 생의 날들 내내 눈에 띄지 않는 듯하다가
어느덧 숲을 이루고 붉은 잎들을 내보이며 뒤에 남은 내게 손을 흔들고 서 있는
사는 동안에는 내내 묵묵했던 나무들아,
저 붉디붉게 단풍 든 복자기나무들아.
*시집/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어느 날/ 도서출판 b
저녁 무렵 실상사에 들러 - 박남원
내게도 인생에 부침이 있어
살던 여자와 이혼하고 무일푼으로 지방의 한 소도시에 내려와
새벽마다 읍내 인력시장에 나가 하루 일당을 벌어먹고 사는
말 그대로 밑바닥 인생이 되었다 처음에는 마음을 다스릴 수 없어
하루에도 열두 번 산굽이를 넘고 곤두박질치다가
그리고 몇 년이 지나 겨우
마음까지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나서야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부처가 된 듯
해탈이, 해탈의 처음 길빛이 혹 이런 것이었나 싶기도 했다.
집 근처 논에서 개구리 밤새 우는 밤이면
멀리 떨어뜨리고 온 어린 피붙이가 가끔 가슴을 흔들어대긴 했지만
자갈밭 진창길에 뒤범벅이 되고 흙투성이가 되어도
아스라한 들녘 끝에서 더러 생명빛은 시원한 바람을 데리고 와 이마를 식혀주고
그리하여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고 그럭저럭 살 수 있었던 것인가도 싶었다.
세상은 여전히 바늘침 하나 밀어 넣을 틈 없이 단단하기만 하고
견고하게 닫힌 돌문 밖에서 수도 없이 부딪쳐 떨어져 내리기만 하다가
결국 해탈을 꿈꾸는 낮은 풀잎들의
숨소리 몇 데리고 오솔길 길 떠나는 실상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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