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혹시나 하고 산다 - 김주태

마루안 2021. 11. 12. 22:45

 

 

혹시나 하고 산다 - 김주태


혹시나 하고 사는 인간들이 주위에 많다
올해는 고추 금이 좀 괜찮을까
있는 밭 없는 밭 고추만 심고
작년에 생강 좋았다고 올해도 혹시나 싶어
논을 밭으로 바꿔 생강만 심고
혹시나 해서 논밭 팔아 주식 하다 다 털어 소식 끊기고
혹시나 싶어 송아지 왕창 들였다가
사룟값만 올라 날품 팔러 다니고
쉰 넘어 장가가서 혹시나
늘그막에 대 이을 아들 하나 보나 했는데
바다 건너온 색시는 이틀 만에 사라지고
아들 대학 졸업하고 살림이 좀 펴지려나 싶었는데
방에서 뒹굴고 있고
혹시나 농협 빛 더 낼 수 있을까 싶어
아침 먹고 부리나케 일어선다
혹시나, 혹시나 하는 사이에 세월만 간다


*시집/ 사라지는 시간들/ 삶창

 

 

 

 

 

 

노갑 씨 가을이 간다 - 김주태


식전 댓바람 치매 걸린 노인
가시나무 한 아름 꺾어
간고등어라 우긴다
툇마루에 두 다리 쭉 뻗고 앉아
등뼈 같은 가시 바른다
뽀드득뽀드득 씹히는 생의 마디들이
부러진다 톡톡
자꾸 넣지 마시라니까요
곁에 붙어 피 묻은 입술
찌꺼기 닦아내는 손이 분주하다
시래기국에 아침 햇살 비비는 숟갈 반짝인다
까실까실한 호박잎쌈에 목이 메어
물 한 모금으로 겨우 숨통 틔운다
청량고추 땡볕에 하루 종일 말리다
느닷없이 우박 맞는다
면 소재지 나가 빚 갚고
오토바이 타고 오다
시멘트 바닥에 굴러
한 보름 병원에 누웠다가 집에 오니

배추밭이 온통 누렇다
홧김에 향촌집 여자와
바닷바람 쐬고 며칠 둥둥 떴다 돌아와
밭둑에 서 있는
노갑 씨 헐렁한 바짓가랑이 속으로 황금빛 바람이
서늘하게 부풀어 오른다

 

 

 

 

 

# 김주태 시인은 경북 봉화 출생으로 2000년 <작가정신>과 2006년 <시와사상>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사라지는 시간들>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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