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만성 계절앓이 - 권영옥

마루안 2021. 11. 11. 22:23

 

 

만성 계절앓이 - 권영옥

 

 

기운을 맞은 단풍나무 위에 바람이 또 분다

잎들이 바람에 반항하는 사이

또 다른 잎들은

고통에서 벗어나 찬 숨을 내쉰다

 

보다 못한 화가가 나뭇잎 뒤편에다

솜털을 그려 넣고 양초를 문질러 붉은빛을 내린다

 

빛에 수장된 이파리들은

첫 항해를 하고 난 배처럼 붉어지고

뚱뚱해진다

 

나무 꼭대기에서부터 흘러내린 빛은

몸통에 이르자 강렬하게 빛나고

빛난다

 

어느 고통도 헛된 것이 없어

줄기 속에서도 굳은살이 박이지만

내겐 찰진 붉음이 찾아왔을 법도 한데 없다

 

퇴락의 끝을 몰랐다

맨땅에 머리 박는 일이며

긁어모아 붉은빛을 훔쳐가는 이도 있었다

 

바람이 단풍잎을 떨어뜨리며 날아간다

 

화가의 발색효과, 늦가을의 색채들은 끔찍하다

 

 

*시집/ 모르는 영역/ 현대시학사

 

 

 

 

 

 

낡은 허기 - 권영옥


지하철 안내방송이 약수동을 알릴 떄
허기진 배를 안고 그가 밖으로 나온다
눈발이 기다렸다는 듯
덥석 안고 포차 안으로 들어간다

깍두기 머리를 한 주인이
국물 철학을 아는지
귀퉁이 잘린 김밥을 가만히 내민다
일어서서 언 밥알에 경배를 하며

그 흔한 한 자리 차지 못하고
무논에 떠도는 모처럼
그는 포차 구석에 쪼그라져 국물을 마신다

오늘처럼 외투 속으로 한기가 들이칠 때면
삶의 저쪽, 잊지 못하는 몸 바깥에는
먹고 먹어도 배고프다던 그의 자본주의 양식
굴욕의 허기가 있다

거참
입에 풀칠한다는 것은

 

 

 

 

 

*시인의 말

 

물줄기가 섬세하게 갈라지는 강가에 서서

물수제비를 뜨고 싶다

살랑거리는 물의 음향은 나를

늘 꿈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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