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지지대는 박혀 있지만 - 이정희

마루안 2021. 11. 10. 22:18

 

 

지지대는 박혀 있지만 - 이정희

 

 

제대로 한 번 서 보겠다는 친구의 다짐에

날인을 했다

너무 쉬운 날인은 야반도주를 모르지만

가끔 이름을 꾹 눌러 놓고

절망의 궤도에 진입한 사람이

도망치는 일이 종종 있다

 

빗나간 으름장,

숨이 가쁜 독촉을 껴입었다

 

이파리가 늘어나는 만큼의 횟수로

빚을 대납했다

가을만 되면 앙상하게 드러나는 암전의 다발

남은 금액에 찬바람이 불었다

흔들려 보겠다던 친구는

무용지물의 이름으로 봄과 가을을 떠돌았다

포기와 체념을 허락할 수 없다는 듯

봄볕은 악착같이 이파리를 늘이며 찾아왔다

비 온 후의 날들처럼

이파리 싱싱한 나무를 키우느라

몇 년 동안을 다른 이름으로 살았다

 

건기의 씨앗처럼 어떤 싹도 피우지 못했다

세상에 굳건한 바람이 어디에 있나

질척거리는 긴 여름도 그럭저럭 지내다 보면

습한 바람이 잦아들고

뒤척이던 마지막 이파리 하나에

믿음이 분다

 

 

*시집/ 꽃의 그다음/ 상상인

 

 

 

 

 

 

기우뚱거리는 물 - 이정희



여자가 길어오는 물은 바닥까지 기우뚱거렸다

한 번도 채워보지 못해 가득이라는 말을 모르는
가족들은 늘 기우뚱거리는 물을 먹었다

파도처럼 요동쳤던 물도

그릇에 따라 놓으면 언제나 반듯했다

여자의 한쪽 다리는 난간처럼 짧았다

아니, 다른 한쪽이 조금 길었는지
길이의 편차로 겅중거리는
그 한쪽이 짧은 물을 먹고 살았다

이상한 일은 그런 물을 먹었음에도
가족들 중 누구도 기우뚱거리거나
한쪽이 짧은 사람이 없다

어깃장 놓는 힘으로 기우뚱거리는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힘주어 걸어야 하는 그 한쪽에 진땀이 베어 나오고
먹구름이 따라다녔다

갈아입을 수 없는 몸에 비명이 부지불식간에 솟아도
숨의 처마에 적막을 우겨넣던 한숨

여자의 심장이 싸늘할 때 기우뚱,

허공을 치받던 불균형도 잠잠해졌다

기우뚱거리는 울음과 한쪽이 짧은 통곡이
장례 내내 들렸다

 

 

 

 

# 이정희 시인은 경북 고령 출생으로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을 수료했다. 2020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가 당선되었고 제3회 해동공자 최충문학상 시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꽃의 그다음>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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