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네의 목적 - 김가령

마루안 2021. 11. 3. 21:58

 

 

그네의 목적 - 김가령

 

 

그네가 흔들릴 때마다 호주머니 안에 소리가 쌓인다

그러니까 그네는 삐걱거리는 소리의 힘으로 나를 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덕 너머 네가 보인다 다시 안 보인다 나는 더 높이 나를 보낸다 너는 여전히 등뿐이다

 

나를 밀고 있던 모든 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네는 왜 일인용만 고집할까

 

흔들 일 없는 그대와 그네 사이가 너무 멀다

가벼운 리듬이 손목 끝에서 멀어지고

처음과 끝의 주기가 빨라 진다

 

풍경들이 나를 가두기 시작한다

나는 매번 같은 얼굴인데 너는 항상 같은 태도다

 

오래 품고 있던 노래 한 소절이 허밍으로 흐른다 가사의 주인공은 매번 너지만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나의 불안이 대척점을 그대로 품는다

원심력은 끝까지 나를 뱉어낼 생각이 없는데, 풍경이 와락 달려든다

 

이제는 어둠이 나를 멀리까지 민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곳을 향해

 

 

*시집/ 너에게 붙여준 꽃말은 미혹이었다/ 문학의전당

 

 

 

 

 

 

쓸쓸함의 배후 - 김가령

 

 

귀뚜라미 소리를 잡아당긴다

소리는 곡선으로 구부러져 돌담 밑 호박잎에 얹힌다

잡아당긴 소리가 나를 밭둑으로 옮겨놓다가

가을 하늘 아래 멈춰 서게 한다

그늘은 어머니의 물렁한 뼈처럼 건조하다

그 자리에 무덤 하나 웅크리고 있다

잎이 돋아난 마음속에 소리만 남겨두고

귀뚜라미는 어디로 갔나

저 혼자 물컹거리는 쓸쓸함만 남아 있다

지금은 가 닿을 수 없는 은유

마음이 질주하는 자리마다 어둠은 배경이 되고

나무는 적막으로 물들어간다

누군가 뚜벅뚜벅 걸어오는 것만 같다

늦가을이 어슴푸레한 고아를 끌어안는다

나무 등걸에 걸린 빛들이 낙화하는 시간 속으로

한 뼘 더 옮겨간다

 

 

 

 

# 김가령 시인은 경북 경산 출생으로 2015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2020년 아르코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너에게 붙여준 꽃말은 미혹이었다>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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