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자서전엔 있지만 일상엔 없는 인생 - 이현승

마루안 2021. 11. 1. 22:33

 

 

자서전엔 있지만 일상엔 없는 인생 - 이현승


딱히 무엇과 싸우지도 않았는데 
이미 패배한 자의 발걸음으로 귀가한다.
패배의 기원은
가늠할 수 없음에 있는가
아니면 거스를 수 없음에 있는가.

퇴각의 핵심은 손실을 줄이는 데 있으니
오늘의 패배는 구태여 찬비를 맞지 않는 데 핵심이 있건만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어서 밤새 세월이
새끼손가락쯤으로 들어올려서 패대기를 쳤는지
잔뜩 두들겨맞은 몸으로 잠 깨는 아침

멍한 정신으로 눈곱을 수습하고 보니
아 돌아오지 않는 활력이여
정신과 기운은 어디 가 아직 돌아오지 않는가.
어서 와라 활력이여

최선을 다해 제자리로 오는 사람은
깜빡 졸다가 하차할 역을 놓친 승객이고
가지고 있는 것을 놓쳤던 사람이니
허둥지둥 세월보다 힘센 책망감에 내몰려
제자리에 돌아와 보면, 그는

늙고 누추한 행색의 과객이다.
지나쳤고 돌아왔으나 결정적으로 뒤늦은 그는
그러나 진심을 다해,
있는 힘껏 자신을 증오해본 사람
한 번은 비워진 사람이다.

 

 

*시집/ 대답이고 부탁인 말/ 문학동네

 

 

 

 

 

 

스포일러 - 이현승


성공에 대한 우리의 감식안은 완고하다.
행복을 구하면서 정작 불행의 신을 섬기는 자답게
우리의 두려움과 의심은 틀리는 법이 없다.
우리의 믿음은
서 있을 수는 있지만 누울 수는 없는 휴식 같다.
편두통 같고 숙취 같은 휴식이다.

우리는 타인의 성공을 쉽게 인정하지 않으며
심지어 결과로서 입증되었을 때조차
아직 그것이 지배적인 결론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네가 잘되는 꼴은 볼 수 없다는 단순한 명제를 두고
우리가 찾아 헤매는 것은 무엇인가.
왜 꼭 죽기 전에야 회개하느냐고 질문한 것은 몽테뉴였지만
가시기 전에라도 내려놓고 가시는 것이
실은 이 모든 의문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긴 하지만

주검과 함께 영원히 묻혀 버리는 진실을 잠깐 물릴 수 있다면
평판이란 즉석떡볶이집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입은 흰 셔츠처럼
부정적인 뜻에서 운명적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라 끓는 감자탕이나 떡볶이를.
모든 끓어오르는 것들에겐 내면의 진실이 있다.
이 게걸스러운 식사를 통과하고도 새하얀 셔츠를 기대한다면
당신은 이 끓고 튀는 시뻘건 국물들이
노르망디 전투에서 사람을 피해간 총알만큼이나 사려깊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쩌면 총알에게 관용을 기대하는 절박한 사람이 되면서
믿음이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는 거겠지만
최소한 기도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별 다섯 개로 점수를 매기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다섯 개가 모여야 하고 다섯 개 중의 다섯 개는 개좋은 경우겠지만
네 개 반의 별 점수를 보라. 신에게도 망설임이 있다.
기다려주지 않는 것은 냄비이다.
끓어넘치는 냄비에게는 재능이 있다.

 

 

 

 

*시인의 말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적으로 최악을 피했을 뿐이라고

철 지난 선거 같은 것을 두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는 최소한 시급한 변화가 필요한 사람일 것이다.

삶은 문제 해결의 과정이고 우리의 선택은 여전히

차선과 차악 사이에서 더 오래 머뭇거리고 있지만,

(.....)

 

내가 겪어보지 못한 아픔에게는 더 벼려진 말보다는

흘려듣기 좋은 말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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