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이라고 하고 벗이라고도 하는 - 손진은
어느 쾌활한 구름이 뛰어내려 일 년에 한 여드레쯤 길고 긴 띨 공중에 펄치다 가시나
허물어진 성, 장렬히 전사한 대왕의 혼령이 그 먼 옛 기억을 불러 올해도 저 뽀얀 성벽을 세우시나
이름이 벚이라고도 하고 벗이라고도 하는,
그 많은 연셀 자시고도 여전히 화사한 족속들이 피워 올린 낭하 속
의무와 간섭에서 벗어난 저 바알간 볼우물의 천사들이, 벌 떼와 삼겹살과 햇살 바람들과 얼려 걸어간다
이름이 벗이라고도 하고 벚이라고도 하는,
무뚝뚝한 가지들이 오물오물 축조한 순결한 저 혼(魂)들의 성!
잃어버린 심장을 찾으려 가릉거리는 우리 안의 원숭일 달래려고 하늘은 한 번씩
여린 목젖의 환하고도 정결한 성가곡 허공 가슴에 흩뿌리시나
*시집/ 그 눈들을 밤의 창이라 부른다/ 걷는사람
단풍 - 손진은
언제였던가, 내 안으로 푸른 병정들이 들어온 건
매일처럼 차가운 물 퍼 올려
짐짝 같은 내 몸 여기저기 꽂아 논 초록 화살
추운 밤과 햇볕의 성정
모두 빨아들여야 하는 살들은
적의를 키워 갔겠지만
나는 알지 함께 눈 떴다는 걸
그러고 보니 그네들은 화살 속에
노랗고 빨간 불 천천히 쟁이고 있었구나
몸도 모르는 분신을 준비해 왔다니
그러면서도 격발하지 않고
머뭇거린 건
이리 많은 인연에 물들었던 탓인가
된서리 내리자
툭! 투둑! 툭툭!
내 가슴 뜨거운 화엄(華嚴)의 불화살이
진흙바다 속으로 빠져나가 쌓인다
들린다, 몸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
바닥이 그걸 받아 주는 소리
작은잎이 가녀린 새 심장처럼 할딱이다 눕는다
*시인의 말
오래 갇혀 있었던 말들을 내보낸다. 이 시들은 과묵했던 문학소년을 길러 낸 고향의 정경과 일상의 자잘한 사건들을 내 '몫’의 말들로 풀어낸 무늬들이다.
터덜거리는 발걸음이 만나는 민들레, 고라니, 주름을 거느린 삶 하나에도 분화구보다도 뜨겁고 죽음마저 따뜻한 체온으로 녹이는 사랑이 있음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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