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 김연진

마루안 2021. 10. 21. 21:50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 김연진

 

 

너무 오래 살았다

 

시간의 전리품처럼 낡고 오래된 동네

살아서 온 것들이 병들고 깨지고 묻히는 동안

나는 그곳에 있었다

 

그곳에서 밥을 먹고 숨을 쉬고 눈을 깜박거렸다

그늘이 사라지지 않는 담벼락 밑에서

채송화와 개미를

낮은 곳에서 이는 바람을 보았다

 

길을 지운 골목들은 행방이 묘연해지거나

도둑고양이처럼 꿈을 훔쳐 달아났다

 

죽음의 냄새와 결핍의 몸들이 엉켜 있는 동네

밤낮이 바뀐 아이들은 유령처럼 담을 넘어

신발을 끌고 가곤 했다

 

먼지 같은 기억들이 먼지를 만들어 쌓여 있는 곳

대추나무가 꽃을 열고

앵두꽃이 거미줄에 걸리는 동안

이곳의 승자는 시간뿐

 

한번 흘러간 나는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시집/ 슬픔은 네 발로 걷는다/ 한티재

 

 

 

 

 

 

공갈빵 - 김연진

 

 

발톱이 그만 자랐으면 좋겠어

 

고양이같이 할퀴지도 못하는

발톱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공갈빵 같은, 먹어도 허기가 지는

배부르지 않은 효모

무엇을 발효시켜드릴까요

아니, 난 어떤 발효를 원하는데

끝까지 할퀴지도 못하는 말의 태도

그래, 당신은 언제나 태도가 문제였어

그 태도, 발톱에 대한 태도

자르지 않는 용기라고 말하면 모순

자를 수 없는 불안이라고 하면 소심

효모가 팽창하면

겨울이 가고 꽃이 피고 아기가 태어나고 발톱이 자라고

그런데 말이야 효모가 수축한다면

시간이 거꾸로 흐를까

사랑의 시작은 이별이 되고

이별의 시작은 사랑이 되는

그러니까 다 자란 발톱이 하루씩 작아져 없어지는 것

당신도 하늘도 점점 작아져 할퀴지 않아도 되는 그곳

 

그곳에서 우리 살아 볼래? 영원히

 

 

 

 

 

*시인의 말

 

내가 기쁨보다 슬픔에 더 잘 반응하는 사람인 것을 알았을 때

나의 생은 더 풍부해졌다. 이 말은 역설적 비극에 가깝다.

 

내 슬픔과 함께 했던 모든 사람에게 무한한 감사와

또 살아갈 힘이 되어준 현, 준

네 발고 걷고 있는 발달장애아 부모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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