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숨뿌리 - 안태현

마루안 2021. 10. 20. 22:07

 

 

숨뿌리 - 안태현


숨에도 
볼 수 없는 뿌리가 있다
이식도 안 되고 재배도 안 되는

내 앞가림도 못하던 시절
가파른 언덕에서 뛰어내리다가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숨이 턱 막혀
마른 가랑잎처럼 몸을 뒤틀자 겁에 질린 동무들은 다 도망가고
어둠의 구렁텅이에서
겨우 되찾은 숨뿌리

조금씩 숨에 숨을 이어가며
살았구나,
안도하던 눈물

가끔 산에 오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면
그때의 숨뿌리가 보인다

내가 나무의 세포인지
고래의 후손인지 모르지만
숨 쉬는 일은
어쨌거나 우주에 입술을 대고 삶을 맛보는 것

숨을 쉬고 있으면
어쨌거나 사람이라고 부르겠지
말도 걸어오겠지

 

 

*시집/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 상상인

 

 

 

 

 

 

저무는 하루 - 안태현
-석굴암 지하다방 2


좁쌀처럼 속 좁은 주방장 잔소리에
온종일 붙들려 있다가
겨우 풀려나온 날은
하얀 헝겊으로 레코드판을 닦는 게 좋았다
노랫말을 외우듯 인생을 외우고 싶었지만
등뼈를 다 드러낸 하루가
하루를 더 지어내어
밥그릇에 담아오는 것 같았다
나는 늘 손님 같은 나에게 대드는 것도 없이 
지고 산다는 기분이 들었다
여름도 지나 가을까지 모기를 앓다 보면
석굴 밖 세상이 더 그리워
몇 편의 성공 스토리를 지어내기도 했다
밤이 초코파이처럼 녹아내린
어떤 밤은 너무나 까매서
함부로 입에 대지 않던 담배를 물고
뉘엿뉘엿 저무는 하루에 지친 몸을 실으면
고향 집 뒤란의 대나무 숲과
새하얀 옥양목 빨래 몇 장
며칠씩 앓다 죽어 나가는 낯익은 화초들도 
풀 죽은 채 안고 가는 슬픔 같았다
달걀 한 알처럼 고요한 내가
석굴을 통째로 차지한 채
너무 일찍 도착한 인생 퀴즈를 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