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초록빛 네온 - 홍성식

마루안 2021. 10. 20. 22:26

 

 

초록빛 네온 - 홍성식

 

 

절뚝이는 짐승 하나 지하도를 지난다

봄은 기다림을 거부했다

박제된 올빼미의 눈동자는 수정처럼 차갑고

사람이 아닌 겨울이 사는 집

누가 있어 세상을 울음 없이 견딜까

 

빈민가를 둘러싼 흉흉한 소문

소녀들의 어깨는 갈수록 야위어가고

곰보다 먼저 겨울잠에 드는 경찰들

북쪽에서 불어온 바람에 벽지마저 움츠러들면

초록빛 네온등 하나 터무니없이 휘황한데

 

없는 길을 찾아 떠돈 건 아닐지

부표 없는 오징어잡이 배의 막막함

지난한 세계를 먼저 살다간 이들의 혼일까

또 다른 생애를 비추는 흐릿한 초록 불빛

암전된 몸이 잠시 잠깐 환하다.

 

 

*시집/ 출생의 비밀/ 도서출판 b

 

 

 

 

 

 

자두나무 아래서 - 홍성식


탕진에만 익숙했던 아버지
첫아이를 가진 엄마는 툭하면 하혈을 했다
구포시장 좌판 위 빨간 자두 하나만 먹었으면
15원어치 마른 국수를 사오며 입맛을 다셨다
이럴 거면 뭐 하러 나를 데려왔나요
뜨거운 김치국수 사발이 벌겋게 뒤집어지고
서러워 떠나온 하늘 바라보는 스물셋 여자
멈춘 생리 대신 동쪽에서 솟은 하현달이 붉었다.

 

 

 

 

# 홍성식 시인은 1971년 부산 출생으로 광주에서 청춘의 한 시절을 보냈다. 2003년 <시경>으로 등단했다. 몇 곳의 신문사를 옮겨 다니며 20년 가까이 기자로 일하고 있다. 시집으로 <아버지꽃>, <출생의 비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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