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음지식물 - 최서림

마루안 2021. 10. 8. 22:04

 

 

음지식물 - 최서림


아직도 연탄을 때는, 연탄재처럼
사위어버린 둘째 형을 생각하다가
눈물이 찔끔 나왔다
펑펑 울어 보고파
울음통을 두들기고 두드려봤지만
텅, 텅, 빈 소리만 흘러나왔다. 

중학을 마치고 고물상으로 들어가
망망대해 서울살이를 향한 돛을 올렸다.
음지식물 같은 여자를 만나
외떡잎 닮은 아이를 낳았다.
택시기사, 배달원, 경비원으로 옮겨 다니는 사이
불량품 돛이 금방 다 부서져버렸다.
외떡잎 아이마저 떡깔나무 숲에 뿌린 후
조카 결혼식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삭아버린 항구 같은 엄마가
해마다 설 추석이면
오지 않을 줄 뻔히 알면서도, 버스정류장에서
'독한 놈, 나쁜 놈' 중얼거리면서도
흐릿한 눈으로
내리는 사람마다 찬찬히 살펴보고 있다.


*시집/ 가벼워진다는 것/ 현대시학사

 

 

 

 

 

 

가벼워진다는 것 - 최서림


미움이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용서의 계곡도 가까워진다.

나같이 마음이 뚱뚱한 사람들에겐
내려가는 길이 더 멀고 힘들다.

울룩불룩 균형이 안 잡힌 마음의 관절이 자그락거려
계곡을 바로 앞에 두고 곧잘 주저앉는다.

까치처럼 가난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가벼워진다는 것이리라.
마음에 구멍이 많아진다는 것이리라.


 

 

# 최서림 시인은 1956년 경북 청도 출생으로 서울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3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이서국으로 들어가다>, <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 <세상의 가시를 더듬다>, <구멍>, <물금>, <버들치>, <시인의 재산>, <사람의 향기>, <가벼워진다는 것>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