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구두와 날짜들 - 이자규
시간을 분리하다 발판을 분리하다 그림자도 따라 갔다
움푹 들어간 날짜가 제거되고 신경선을 걷었다
비는 내리고
스쳤던 등받이에 닳아빠진 낱말들
흰 유니폼들이 인공 웃음으로 지나가고
비바람은 사선이다
금속성 데이트를 등으로 새겨야 했기에
바퀴를 뜯어내는 기억을 붉은 녹이 말했다
날것들이 눈꺼풀에 날아들었다
빈 구두와 빈 모자 그리고
미소가 필수인 종양실과 바흐가 흐르는 채혈실
붉은 장미가 각혈을 부풀렸다
방천 둑 쇠비름 따위나 되어 꽉꽉 밟히고 싶은
불면 한쪽을 난도질로 쥐어뜯는다면
단풍잎 울음은 어느 휠체어에 앉히나
하늘이 낮아졌다 '당신이 밀고 내가 앉고 싶어' 내 말에
'여기까지 내 그릇인가 봐'
우북이 쌓인 말들만 난무했다
*시집/ 아득한 바다, 한때/ 학이사
허 씨는 매일매일 - 이자규
빈 박스를 접어 리어카에 집 한 채 짓고 있다
움직여야 산다는 진단을 받았다는 허 씨
초저녁잠과 새벽별이 삶의 공식이다
힘센 걸로 네모 기둥을 세우는 건 마음의 골조를 다진다는 뜻
한 치의 틈도 없이 다짐을 쟁여나간다
도매시장의 연대기적 시간에서 쏟아진 허 씨의 희망들
발바닥에 땀이 나고 새벽 국밥이 달다
둥근 지붕이 둥근 결기로 완성되어 가면
가로수 이파리를 사운거리는 인사로 푸르러지는 가슴이라 했다
그가 말하는 잉여인생이라면 지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기초 다져 석 자 높이까지 올린 지붕이 그의 팔뚝 근육이다
둥근 바퀴가 지그재그 방법으로 천천히 골목을 기어나간다
사람이 사람을 맞을 때 턱의 각도를 낮추듯
수레 앞쪽을 낮추어 넒게 무게 실으면 다음 보폭이 수월해진다는 것
경사졌던 허 씨의 길 일흔일곱 수레바퀴 길
지폐보다 높은 자기장이 허 씨를 모시고 간다
# 이자규 시인은 경남 하동 출생으로 2001년 <시안>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우물 치는 여자>, <돌과 나비>, <아득한 바다, 한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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