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 슬픔에 수저를 얹고 - 이은심

마루안 2021. 10. 4. 19:19

 

 

내 슬픔에 수저를 얹고 - 이은심


끼니때마다 호명되는 냄비가 덜컹덜컹 우는 것은 맞지 않는 뚜껑 때문인데
간처럼 졸아붙는 삼중바닥이 되지 못한 까닭인데 이를 테면

한술 밥에 배부르다는 착각이
한술 밥에 배불리려는 억지가 시궁쥐에게 갉아 먹히는 것인데

잊을 만하면 입속의 차가운 말들을 불태우고
그때 내 슬픔에 수저를 얹고 밥 먹어둔다는 말은 얼마나 고픈 말이었나

숙식제공과 월수입 보장의 한복판에서 몇 개의 뺨을 적시느라 다 써버린 눈물이 배불러오는 공복을 허겁지겁 퍼먹던 그때 밥이 밥을 굶기던 그때

꺼질 듯 말 듯한 신화 그것이 연민을 불살라먹던 불씨라는 걸
탈 듯 말 듯한 연민 그것이 불씨를 익혀먹던 신화라는 걸

아름다운 불구경을 건너면 뿌리내린 공복에게 젖 물리는 안부조차 누군가에게 먹히는 밥이어서 쉽게 식는 수저에 들러붙는 파리 떼
조롱은 뒷모습으로 웃고

약이 바짝 오른 끼니 하나가 밥 얻어먹는 사람을 시커멓게 바라보던 그때

 

 

*시집/ 아프게 읽지 못했으니 문맹입니다/ 상상인

 

 

 

 

 

 

값은 - 이은심


얼마냐고 물으면 선서하는 손을 올리고 마네킹은 지나가는 나를 꼭 부른다 주말은 평일을 소비하고 평일은 빳빳한 고개를 유혹하고
누군가 쓰다 남긴 겨울이 쇼윈도에서 내의만으로 포즈를 잡는 동안

손이 가요 손이 가는
유행은 처음엔 어색하고 들여다보면 솔깃하고

천하의 일색을 도모하던 내 안의 여자는 이제 천하가 일색이 아님을 안다 왼손이 하는 일에 줄을 선 오른손이 셀수록 불어나는 가격에 나를 팔아 애인을 사고 연말깜짝세일과 창고대방출은 화장실에서 바뀐 온도를 갈아입을 것이다 턱턱 낮춘 계단 밑 소파에서 주머니의 의중에 손을 넣어보면

미안해요 괜히 나 때문에

꿈꿀 수 없는, 꿈꾼들 인색하기만 한 이십 대와 삼십 대 사이
신제품은 명랑하고 퇴폐의 사이즈는 말랑말랑해
주먹눈까지 끼워 파는
값은 높은 값에 취하고 충동은 문을 잃고 쇼핑백만 건졌다

 

 

 

 

# 이은심 시인은 대전 출생으로 한남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95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2005년 계간 <시와시학> 신인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오얏나무 아버지>, <바닥의 권력>, <아프게 읽지 못했으니 문맹입니다>가 있다. 2019년 대전일보문학상, 한남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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