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무화과 피던 자리 - 이문희

마루안 2021. 9. 22. 19:28

 

 

무화과 피던 자리 - 이문희


나무가 앓기 시작했다


남자는 야반도주를 하고
여자가 집을 나갔다
혼자 남은 무화과 이파리가 온 마당을 훑고 다녔다

우편함의 소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확성기 소리를 몰고 다니던 트럭이
매일 오는 장이 아니라고
생선 비린내 진을 치고
채소가 떨이로 목청 돋워도

유학 간 딸아이의
혼령이 스타인웨이를 타고 흐르고
검은 정장의 사내들 레드카드로 경고하는 집

열리지 않았던 파란 철문을 연 건 영구차였다
액자 밖의 사람들
몇은 담장에 기대 숨죽였고
정원은 말라갔다

막 맺기 시작한 무화가 열매가 장례행렬 속으로

떨어지던 오후

 

*시집/ 맨 뒤에 오는 사람/ 한국문연

 

 

 

 

 

 

칸나가 저녁 문턱을 넘는 풍경 - 이문희


칸나가 피었는데 우린 왜 쓸쓸하죠?

시골 간이역 근처
허름한 여인숙 마당엔 유독 칸나가 붉었어요

그날 우리의 신음 위로 기적은 안달이 나 덜컹거렸고
누군가는 어둠의 아가리를 기어코 찢어대는지
밤새 비명을 질러대곤 했었는데요

누가 내 안에 칸나를 심어놓았나요?

 

저녁이 칸나의 붉은 울음으로 오고

젖은 목소리로 내 몸을 기웃거릴 때
몰래몰래 늙어가는 저녁이 스스로 주저앉을 때
어둠 속을 왕진하듯 다녀가는 칸나의 이빨자국

나는 어둠 한 장이 되어
정작 너에게로 건너가는 한순간이 오고야 만다는 걸 알아버렸어요

나로부터 오래 돌아가기 위해 칸나가 저녁을 몰고 오는

그때

 

 

 

 

# 이문희 시인은 전북 전주 출생으로 2015년 <시와경계>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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