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나이쯤 되면 - 최준
아닌지, 문득 곁눈질로라도
어둠이 그리우면 몸이 쇠했다는 증거
누구나 그 나이쯤 되면
혼자 가게 되는 것 아닌가
그만큼 했으면 싸움질도 싫증이 나고
거친 숨과 뜨거운 몸도 식힐 줄 알지 않는가
열어놓은 마음 문틈으로 얼비치는 죽음 그림자
그걸 모시느라 여기까지 당도했다는 걸
깨닫게 되지 않는가
고통하며 세운 모든 것들이
결국은 세월 속에 무너내리는 소리 들리지 않는가
누구나 그런 죽음의 몸종으로 한세상 살아왔음을
아는 것 아닌가
길은 늘 생애보다 길게 마련인 것
그 길 도중에서 나 죽으면
눈 귀 어두워지면
남겨진 길로는 몸 떠난 마음만 갈 일인 것을
마음만 자욱히 운무에 헤매일 것을
그런 어둠 속으로
몸 끄느라 지친 마음만 죽음을
죽도록 그리워하는 것을, 그런 때
곁을 질러가는 무명의 개 한 마리 예사롭지 않네
가을 깊으면 개도 집이 그리운 건지
휘청휘청 킁킁거리며 옛 기억 더듬어 가네
*시집/ 칸트의 산책로/ 황금알
행성 - 최준
보이지 않아서 무서운 게 자꾸 없어지는
그게 무서워
혼자 숨어 서서
지나가는 것들의 날개에 매달린다
분노가 열두 번 우주를 왕복하는 동안
슬픔이 은하를 한 바퀴
알 수 없었다
바깥을 가둬두고 싶은 것인지
안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인지
날마다 떠 있을 태양
오늘도 해안을 들락거리고 있을 파도
고대의 돌기둥들과 너무 오래 싸우느라
바람은 어제보다 좀 더 상처 깊은 골짜기를
찾아 헤맬 것인데
나가지 마라 나서지 마라
입술이 소금에 절은 창조주가 구름에 대고 말한다
상해 가는 주머니의 별들을 꺼내 보여주면서
그러니
어쩔 수 없다 나를 열고 내 안을 비집고 들어서며
저녁을 다시 감춘다
너무 커서 오늘도 끝자락을 만져볼 수 없는
저, 검은
내 안의 무한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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