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 천양희
하늘이 흐려지더니 마음이 먼저 젖는다
이런 날은
매운맛을 보는 게 상책이다
아귀찜 먹으러 '싱싱식당'엘 간다
손아귀로 아귀를 뜯으면서 생각한다
지금까지 무엇을 하며 살았나
입속이 화끈거린다
나에게도 분명
매운 세상이 지나간 것이다
비처럼 젖는
세상의 예사로운 일이여
어떤 것은 눅눅하여
얼룩 된 지 여러날이다
비둘기가 종종거리며 길바닥을 찍고 있다
자전거를 굴리며 소년이
천상병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시인은 죽어 거리를 남겼다
모든 확신은
증오로 사랑으로 다가오는 것인지
생(生)의 후반이
우두커니 서 있다
별나지 않은 사람들의 별나지 않은 일에
귀 기울이는 저녁까지
비는 그치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기를 써야 할 날은
오늘 같은 날이다
*시집/ 지독히 다행한/ 창비
다시 쓰는 사계(四季) - 천양희
초록이 조금씩 지쳐가더니
바람의 기색이 달라졌습니다
지난 일은 참 더웠습니다
구름이 흩어지는 걸 보니
가을이 가까운 듯
산그늘이 깊어집니다
그늘에 기대어
수고로운 인생이라 쓰고 지웁니다
정답 없는 질문에 해는 기울고
사람의 눈이
별빛을 만들기도 합니다
안간힘을 인간의 힘이라 하기에
눈이 녹으면 봄이 된다는 걸
겨우 알았습니다
다음날은 노루목에 서서
사람이 많아 잊기도 한 하늘을
오래 바라보기도 하겠습니다
사는 일이
거두는 일보다
지독히 다행한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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