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단단하던 여름빛이 눈에 띄게 풀려서 - 안태현

마루안 2021. 8. 29. 19:28

 

 

단단하던 여름빛이 눈에 띄게 풀려서 - 안태현


어젯밤엔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가는
등 푸른 바다를 베고 잠들었다

너는 아프지 말라고
내 잠 곁에서
끝물처럼 우는 풀벌레들이 있었다

한껏 땀을 흘리고 나면
무너지는 기운과
새로 솟는 기운이 파김치처럼 한데 어울렸다

커다란 나무 그늘에 앉아 읽는 
구름 한 장
나를 위해 메어둔 돛배 같고

내 손에 아직 남은 청춘의 빛
그것이 언제까지 유효한 것은 아니지만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여름 이후의 일은 알지 못하므로
한 뼘씩 짧아지는 빛을 보면
앞날을 타협하고
때론 구걸한다

 

 

*시집/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 상상인

 

 

 

 

 

 

그늘 반 연두 반 - 안태현


바닥에서 연두 같은 술렁임이 일어 사랑하고 싶은 날도 있었다

그늘 반 연두 반
그러나

그곳에 누워 있으면 독백이 더 잘 들린다 슬프다는 뜻은 아니다 아무리 살펴도 건너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맨발로 걸어오는 저 사내는 흩날리눈 꽃잎처럼 스쳐 지나가며 잠 밖에서 나를 다시 그곳에 옮겨 놓는다
사람의 안쪽에
서로 들여다보는 내부가 있다

나는 섞이지 않고
그렇다고 따로 놀지도 않고

문을 닫지 못해서
물결 소리가 나는 그곳으로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마침내 나의 겨울도 올 텐데

나는 사내가 주고 간 지팡이를 짚고 사내처럼 맨발로 걸어 흙먼지가 이는 길을 걸어 내려간다
그늘이든 연두든 

바닥으로 돌아가서 하나씩 허물어보고
하나씩 들춰보고
그것이 한 생으로 쓰인 것이라는 것을
몸을 구부리며
나는 안다

 

 

 

 

# 안태현 시인은 전남 함평 출생으로 2011년 <시안>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이달의 신간>, <저녁 무렵에 모자 달래기>,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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