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벽암록(碧巖錄) - 최준
자신(自信)을 못 믿는데
어디서 자신(自身)을 찾겠나
청사(廳舍)와 의사당(議事堂)의 부조리나 채굴하려다
속아온 길
구만리(九萬里)
날마다 수염을 깎고
베고 잤던 무릎에다 대못을 치네
저를 잃어버리고도 저리 말짱한
물그림자에게 만이라도
제대로 보이고 싶어서
천년 바람의 가야금 줄도 실은
몹쓸 인종사(人種史)처럼 소용없는 것
어떻게 걸어왔는가를 고백하라면
한나절은 말할 수 있지
그게 설혹 구만리 허황일지라도
변명이란, 나를 속여 온 나의
절반의 절반에도 못 미칠 얘기
아직은 멀쩡한 두 주먹으로
머리 쥐어박으며 걸어가다
옛 스승들처럼 홀연히 증발해 버린다 해도
세간에서의 울화를
어찌 우화(寓話)였다 말하지 않을 수 있으리
나를 지나오고 있던 나를
눈 뜨면 솟아 있는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잔소리나 들으며
못 박힌 무릎 절뚝이는 오늘을
아, 그러니 실패는 내 어머니가 아니셨네
이번 생은 결코 성공했다 할 수 없으니
*시집/ 칸트의 산책로/ 황금알
주목(朱木) - 최준
붉다! 그 이름만으로도
나는 이미 전생을 엿본 것이다
이 붉은 내 안의 거대 묘지는, 그러니까
죽음이지만 슬프지는 않은 것이다
슬플 노릇만은 아닌 것이다
나는 영생을 살아낸 것이다
묘비 하나 바로 세우면 전생도 달라진다는,
계절과 시간을 뛰어넘은,
모든 흔들림 다 죽여 버린
저 견고한 정적
굳이 주목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천 년을 주목하지 않아도 그만인 것이다
# 최준 시인은 1963년 강원도 정선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4년 <월간문학>, 1990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에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너 아직 거기서>, <개>, <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 <뿔라부안라뚜 해안의 고양이>, <칸트의 산책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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