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시큰거린 이유 - 손석호

마루안 2021. 7. 8. 19:33

 

 

시큰거린 이유 - 손석호


콧등에 기댄 안경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릴 때, 문득
내 풍경이 누군가에게 등을 기대고 있는 것 같아
살며시 눈이 감겼다

언젠가부터 앙상한 풍경 속에
당신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아
억지로 기억해 낸 체취에 기대어 잠들곤 했는데
빗소리에 놀라 눈뜨면
체취는 항상 말끔하게 씻겨져 있었다

장마의 밤이었다
체취가 젖지 않게 마음속에 코를 닮은 오두막을 짓고
창을 활짝 열어 놓았다
며칠을 기다려도 아무 냄새가 나지 않아
창밖으로 목을 빼내 킁킁거렸다

콧등으로 빗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시집/ 나는 불타고 있다/ 파란출판

 

 

 

 


구속 - 손석호


고3이던 그해 늦은 사춘기가 찾아왔고 논을 갈던 우리 집 암소가 송아지를 낳았다 촌에서 공부 좀 한다고 읍내에서 하숙까지 시켰지만 송아지가 걸음마를 배울 때 오토바이를 탔고 송아지가 젖을 빠는 동안 옆집 누나의 부푼 가슴을 생각했다 송아지가 젖을 뗄 때까지도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었지만 대학에 합격을 했고 송아지는 등록금을 남기고 집을 나갔다

여태껏 돌아오지 않는 무언가를 기다리며
막막한 들판 어디쯤에서
송아지 대신 꿴 코뚜레의 고삐를 잡고 있다

어디로 갔을까


 

 

# 손석호 시인은 경북 영주 출생으로 1994년 공단문학상, 2016년 <주변인과 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나는 불타고 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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