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승화원에서 - 손병걸

마루안 2021. 7. 11. 19:16

 

 

승화원에서 - 손병걸

 

 

서해가 빤히 보이는 모텔에서 발견된

막노동꾼 동생이 누운 목관이

입술을 앙다문 형제자매들을 지나

화구 속 불길로 빨려 들어간다

 

죽음의 완결을 호명하는 전광판 숫자만큼

승화원 창밖에도 어제의 일몰을 닮은

흰 구름들 다시 한껏 붉은데

돛대도 삿대도 없이 머나먼 길을 나선

동생은 어떻게 아침을 맞이할까

 

뜨거운 뼛가루 손에 움켜쥔 채

형제자매들 차마 손을 펴지 못하고

분향소 곁 계수나무 위 새들도

가느다란 가지를 꽉 움켜쥔 채

좀처럼 울음을 멈추지 못한다

 

높고 긴 굴뚝 위로 굵은 연기가

망망한 허공에 길 한 가닥을 놓아줄 때

그제야 노을빛 눈동자들 하나둘 입을 모아

즐겨 부르던 동생의 노래 가사를

밤하늘 한복판에 마디마디 새긴다

 

일렁이는 소절들 범람하듯 환하게

흐른다 하얀 쪽배에 동생을 싣고

바알간 해 앞서간 수평선을 향해

흐른다 푸른 하늘 은하수 서쪽 나라로

 

 

*시집/ 나는 한 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 걷는사람

 

 

 

 

 

 

강 - 손병걸

 

 

남자가 취했다

 

궁싯궁싯 여자의 몇 마디에

와지끈 밥상이 엎어졌다

튀어 오른 숟가락 젓가락이

잠든 척 누운 아이 얼굴에 떨어졌다

 

남자는 또 방에 갇혔다

 

풀벌레 울음소리 뒤엉키는 강둑에서

여자의 치맛자락이 아이의 이불이 되고

강 건너 하늘 별들 틈에서

별 하나가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여자는 두 눈빛을 반짝이며

재빨리 강물에 손을 담갔고

여자 손에 건져진 별 하나가

아이 머리카락 속에 깊숙이 감춰졌다

 

찬바람은 아랑곳없이 아이를 지르밟고

밤새 뭉치 바람을 밀어내며

한껏 붉어진 여자의 두 눈이

막 잠을 깬 아이 눈과 마주할 때

 

강둑 아래 키가 큰 갈대숲에서

새 한 무리 후두두 날아오르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시퍼런 강물 속에서

눈부신 금빛 햇살이 일렁일렁 일었다

 

 

 

 

*시인의 말

 

헤아릴 수 없는 기억들이 모여드는 곳

 

신경세포와 신경세포 사이의 작은 공간

 

원자, 분자, 고체, 액체, 기체도 아닌

성분을 모를 기억들이 쌓인 저장고

 

죽는 날까지 가득히 채울 수 없는

고작 타원의 공간 속 한편을 차지한

설렘, 희열, 슬픔, 분노, 그 긴장과 전율

 

그래서 다시 그러나 그리고 그러므로

멈춤 없이 접속사를 생성할 때마다

다음 문장들을 아예 툭, 툭, 끊어 버리는

 

투명한 허공 속 가득 찬 사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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