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역병이 도는 여름 - 이상국

마루안 2021. 7. 12. 19:25

 

 

역병이 도는 여름 - 이상국

 

 

역병이 도는 여름
이웃집 백일홍이 피자 동네가 환해졌다
사람이 사람을 피해 다니든 말든
때가 되면 꽃은 사정없이 핀다.

꽃은 사람에게 겁먹지 않는다.
사랑하지도 않는다.
저 자신으로 꽃일 뿐,

저들도 병들고 아플 때가 있겠지만
꽃은 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이들도 얼굴을 가리고
벌 받은 것처럼 조용한 여름
백일홍 꽃숭어리들이 바이러스처럼 붉다.

 

*시집/ 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 창비

 

 

 

 

 

 

복날 생각 혹은 다리 밑 - 이상국

 

 

아직도 복(伏)이 되면 다리 밑이 그립다.

어렸을 적 같으면 동네 사람들과 똥개 한마리 앞세우고

솥단지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던 곳

지금은 고향에도 모르는 사람들이 산다.

 

이제 개 추렴 같은 건 너무 촌스럽고 또

반문화적인데다가

다리도 차가 지나가면 무너질 것처럼

우르릉우르릉하던 옛날 다리가 아니다.

 

어느 해인가 형들이 다릿발에

개를 매달고 두들겨 패다가

목줄을 끊고 달아나는 바람에 한나절

쫓아다니던 때도 있었다.

 

다리 밑은 원래 그늘과 바람의 집이었으나

전쟁이 끝나고 오갈 데 없는 문둥이나

비렁뱅이들이 모여 살기도 했다.

처녀를 붙잡아다 애를 만든다고도 했다.

 

복날은 원래 농사꾼들의 명절 같은 것이었다.

지금은 장사꾼들 세상이 되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해마다 복은 와서

비어 있는 다리 밑이 너무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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