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가 있다, 살아야겠다 - 이문재
죄짓고 살자
오늘 밤
아기 예수 다시 오시도록
죄 많이 지으며 살자
원수를 미워하자
자비로부터 멀어지자
오늘부터
부처님 외롭지 않으시도록
우리 죄짓되
죄다운 죄 지으며 살자
원수를 저주하되
원수다운 원수를 저주하자
물론 법도 어기자
어길 만한 법 어겨서
법이 법다워질 수 있도록
법도 어기며 살자
죄가 있다
살아봐야겠다
보란 듯이 한번 살아봐야겠다
*시집/ 혼자의 넓이/ 창비
얼굴 - 이문재
-아주 낯익은 낯선 이야기
내 얼굴은 나를 향하지 못한다
내 눈은 내 마음을 바라보지 못하고
내 손은 내 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얼굴은 남의 것이다
손은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기 위한 것
누군가에게 내밀기 위한 것이다
입과 코가 그렇고
두 귀는 물론 두 발도 그러하다
안 못지않게 바깥이 중요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 앞에 있는
나 또한 가장 귀중한 사람이다
조금 낯설지만
알고 보면 아주 낯익은 이야기다
# 이문재 시인은 1959년 경기 김포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2년 동인지 <시운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제국호텔>, <마음의 오지>, <산책시편>,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지금 여기가 맨 앞>, <혼자의 넓이> 등이 있다. 김달진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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