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흐르는 강물처럼 - 김재룡

마루안 2021. 6. 25. 20:08

 

 

흐르는 강물처럼 - 김재룡

 

 

사랑, 그런 거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사랑이라는 건 목숨을 거는 거예요. 속삭이듯 말했다. 그런 것이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속절없는 것이었다. 목숨을 걸 수 없었으므로 내 사랑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죽었다. 그날이었다. 천년의 세월은커녕 단 하루도 기약하지 못하고 소멸되었다. 안녕.

 

그렇게 내 그대를 떠났던 것은 세상의 처음이 궁금해서였을 터이다. 애초에 뒤돌아 볼 일이 아니었다. 떠나온 것들에 대하여 뒤돌아보는 것도 어쩔 수 없겠다. 작정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는 동안이겠다. 그대 또한 깊어가는 강물의 가장 깊은 곳만큼 아주 조금은 흔들렸으리라.

 

죽어 떠나간 것들이 살아 있는 것들을 뒤돌아보는 것이다. 떠나야 만날 수 있는 세상의 끝. 그러므로 그대를 떠나온 나는 매일 매일을 세상의 끝에 닿았을 것이다. 아무렇게나 불어오는 그 바람의 경계에서 상한 짐승처럼 그대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끝내 목숨을 걸지 못했으므로 매일 죽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 것이었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랑이 끝났을 때 각성의 번개가 벼락을 불렀다. 이미 폐허이며 죽음인 곳으로 뜨겁던 심장은 하찮게 매장되었다. 그뿐이었으나 소름처럼 돋아나오는 속삭임의 기억들은 대뇌피질에 각인되었다. 그렇게 죽어간 것들에 더해 살아 있는 것들은 다 살게 마련이었다.

 

그렇게 이제는 죽어도 살아도 그만이겠다. 드디어 오래전이나 방금 죽은 자와 아무렇게나 살을 섞어도 되겠다. 내가 떠나왔던 그 자리에 그대 스스로 우뚝하다. 아픔이며 기쁨인 캄캄하고 깊은 물빛 눈물로 있다. 그대 거기에 있음에 더 이상 힘겨운 힘은 힘도 아니다. 그대를 다시 바라보거나 지나칠 수 있겠다. 내려놓은 울음이 무게와 중심을 삼키며 강물처럼 흘러도 그만이겠다.

 

그렇게 그대에게 가는 동안 온통 눈부시던 골목길과 대문이며 창문이 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한 생애 가득 흔들리며 젖어오는 눈물 같은 것들이 있다. 저마다 한 하늘을 이고 지나가거나 머물러 있는 것들이 있다. 내 안의 그대 거기에 그대로 있어주어 고맙다. 정말 다행이다.

 

 

*시집/ 개망초 연대기/ 달아실

 

 

 

 

 

 

춘천에서 미용실을 찾아 헤매다 - 김재룡

 

 

버스터미널에서 내린다. 오후 세 시쯤. 너무 일찍 왔군. 춘천을 떠난 후 스무 해가 넘었다. 두어 달에 한번 꼴로 춘천에 닿지 않으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 여겼다. 보고 싶은 사람, 가봐야 할 곳이 많기도 하군.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갑자기 머리를 자르고 싶어졌다. 남부시장 쪽으로 무작정 걷다가 춘중 쪽으로 방향을 튼다. 중앙로를 따라 오르며 미용실을 찾는다. 이 동네는 20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별로 변한 게 없다. 빙빙 돌아가는 미용실 간판이 눈에 띈다. 남자와 여자가 머리를 자르는 장소가 다른 것이 새삼스럽다. 그냥 이발소로 들어가려다 포기한다. 창도 없는 출입문. 분위기가 수상하다. 중앙시장으로 들어선다. 미용실이 많기도 하다. 깔끔해 보이고 젊은이들이 이용할 것 같은 이층에 있는 곳을 가려니 왠지 또 그렇다. 중앙시장 지붕이 뜯겨지고 새로 공사를 하고 있다. 명동 쪽으로 갈까 하다가 순댓국집 골목을 지나쳐 육림극장 쪽으로 향한다. 광목으로 차양을 댄 옷가게며 반찬가게들이 안쓰럽다. 고개턱쯤에 미용실이 있다. 그냥 들어가려다가 포기한다. 육림극장을 그냥 지나친다. 운파사거리로 들어섰다. 뒷골목 길가에 미용실이 또 서너 개 있다. 영세한 미용실이 참 많기도 하다. 장사가 될까 하는 걱정이 든다. 길에서 빤히 들여다보이는 미용실들에 결국 들어가지 못한다. 다시 망설인다. 옛날 우륵다방이 있던 모퉁이 건물 허름한 미용실로 들어선다. 머리를 자르는 내내 영 불안하다. 머리도 감지 못하고 나갈 것 같아서다. 머리를 자르기로 작정한 것을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바랜 커튼 사이로 보이는 세면기도 때에 절어 있다. 머리를 감자고 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지 싶다. 목욕탕을 찾아야겠다. 근처에 목욕탕이 있었는지 기억이 없다. 효자동 쪽으로 가다가 다시 발길을 돌려 후평동 쪽으로 횡단보도를 건넌다. 중화루 뒤편 길로 빠져 강대 후문 쪽으로 올라간다. 생각해 보니 춘천에서 혼자 이렇게 많이 걸어본 적이 없다. 찾았다. 효자목욕탕. 가을날 목욕탕 오후는 텅 비어 있다.

 

 

 

 

# 김재룡 시인은 1957년 경기 양주 출생으로 강원대 사범대학 체육교육과를 졸업했다. 1985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1989년 전교조 결성부터 현재까지 조합원으로 있다. 서울과 강원도 등에서 오랜 기간 체육 교사로 근무하다 2019년 8월 화천고등학교에서 정년을 맞았다. <개망초 연대기>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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