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구주사를 맞고 - 황동규
한 달에 한 번 병원 침대에 누워
외눈 덮개로 얼굴 가리고
황반변성 안구주사를 맞고
거즈로 덮은 눈과 산동산(散瞳)약 넣어 초점 잃은 눈 위에
안경을 얹고
희미하게 놓인 구두 찾아 꿰 신고 병원을 나선다.
어른거리는 붉은 불빛, 걸음을 멈춘다.
9년 전인가 서천군 마량 선창가,
생선 부리는 배에 걸린 늘어진 깃발들이
안개 속에 갑오징어들처럼 매달려 있을 때
생선 잔뜩 실은 자전거 무게에 눌려
핸들 붙잡고 꼼짝없이 서 있던 사내,
눈은 뜨고 있었던가? 잠깐이 한참이었다.
안개 저편에서 인기척처럼 경적이 울리고
핸들에 매달린 그가 자전거 바퀴에 끌려간 뒤에도
나는 거기 서 있었다.
용케 넘어지지 않고 안개 밖으로 빠져나갔군.
걸음 떼는 순간 내가 그만 발 헛딛고 비틀거렸지.
동공 열린 안구에 인기척처럼 푸른빛이 들어온다.
살짝 굳은 안개 같은 땅을 밟는다.
투명하게 걷자.
더 잘 보이는 땅에서 비틀댄 적도 있었어.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사
조그만 포구 - 황동규
삶의 폭 점점 졸아들다
조그만 포구 되었다.
하루에 버스 한 번 들고나는 곳.
눈인사하며 지내던 사람
다시 보면 뵈지 않고
빈집에 안개처럼 피는 꽃들,
파도가 밀려와 조그만 방파제 넘다
물보라 되고
가을이면 단풍이 뒷산을 듬성듬성 색칠하다
다시 보면 빈 나무들만 남는 곳.
아침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지만
조그만 고깃배들이 아침을 데리고 온다.
어떤 날은 버스가 안 들어오고
파도가 파도를 무동 타고 방파제를 넘기도 한다.
공중에 뛰어올라 빛나는 물고기도 있다.
속으로 소리 친다.
떨어지기 전 방파제 끝에 액막이 제웅처럼
뻣뻣이 서 있는 인간을 내려다보게.
그러곤 공중 맛을 본 몸뚱어리를
타악! 출렁대는 삶 한가운데로 내리꽂게.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봇 0호 - 윤석정 (0) | 2021.06.27 |
---|---|
세습의 기술 - 조기조 (0) | 2021.06.26 |
죄가 있다, 살아야겠다 - 이문재 (0) | 2021.06.26 |
흐르는 강물처럼 - 김재룡 (0) | 2021.06.25 |
유월의 구름 - 최준 (0) | 2021.0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