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세습의 기술 - 조기조

마루안 2021. 6. 26. 22:05

 

 

세습의 기술 - 조기조


척박하든 기름지든
태어난 자리에서 생을 다하는 너는
붉은 꽃을 피워 말한다
염치없이 챙기기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고
붉은 열매를 달고 말한다
무턱대고 주기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다른 이의 욕망보다
자신의 욕망으로
살아가는 너는 말한다
대롱의 욕망으로 꿀을 만들고
부리의 욕망으로 과육을 익히고
바람의 욕망으로 씨앗을 말리며
자가수분처럼 세습처럼
음탕한 것은 없다고
붉은 씨앗을 날리며 너는 말한다.

 

 

*시집/ 기술자가 등장하는 시간/ 도서출판 b

 

 

 

 

 

 

기술자의 가방 - 조기조


기술자의 가방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당신을 꼼짝 못 하게 만든 문제가 
해결만 된다면 기뻐할 뿐
당신을 애태우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짜증을 낼 뿐
나사 하나 바꾸고 몇만 원 받는다고
사기당했다 말할지언정
기술자의 가방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기술자의 가방 속에는
대단한 것이 들어 있지 않다
미장공에게는 쇠손 하나
철근공에게는 갈고리 하나
배관공에게는 스패너 하나
전기공에게는 드라이버 하나
때론 먹을 시간조차 없었던
컵라면이나 들어 있을 정도
기술자의 가방 속에는 무슨

대단한 것이 들어 있지 않다

기술자의 가방을 열어보지 마라
가방 속의 반복되는 수줍은 일상을
끝내 열어보고 나서야
당신의 무관심보다 보잘것없는
기술자의 수치심을
슬퍼하거나 노여워할지도 모른다
기술자의 가방을
함부로 열어보지 마라
기술자가 죽더라도

가방을 열어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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