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 손병걸

마루안 2021. 5. 28. 21:46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 손병걸

 

 

고운 꽃잎에 베인 허공이

파르르 떨고 있는 모습을

한참 동안 들여다본 적이 있다

 

그날부터 나는 걸음을 가만가만 내디뎠고

키가 큰 나뭇가지에 찔린 먹구름 속에서

소리 없이 내리는 빗물 한 방울도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그만큼 길 위에서 자주 젖었고

굵고 긴 빗줄기가 멈춘 뒤에도

한여름 뙤약볕 속을 길게 걸었다

 

언젠가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것 같은

그늘 숲속 나무 밑동 아래에서

바싹 마른 풀잎 한 가닥이 차지했을 허공이

또다시 풀잎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동안에도

나는 주저 없이 되돌아 걸어야 했다

 

넓어진 보폭만큼 내 몸이 빠르게 자라며

음파음파 패인 허공의 신음이

바람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될 때쯤

나는 겨우 둥글게 잠들기 시작했다

스스로 몸을 말며 작아지는 것들은

허공의 내력을 다 읽어낸 뒤 찾아오는

계절의 감정을 닮은 노을의 통증 같은 것

 

오늘 밤은 이불을 멱까지 당겨 눕듯

바람 덮인 길마다 나뭇잎들이 뒹군다 무딘 모서리들을 접고

돌멩이들도 구른다 시푸른 강물 속으로 스민 허공이

하염없이 물길의 낮은 자세를 따라 흐른다

 

 

*시집/ 나는 한 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 걷는사람

 

 

 

 

 

 

광부 - 손병걸

 

 

치솟는 안압 때문에 무자비한 통증에 시달린 지 이년이 지났을까 어찌어찌 마지막 수술을 마치고 시각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결과를 전혀 예상 못 한 터라, 한동안 골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살아갈 길이 막막하기도 하고 몸도 아파서 밤새워 뒤척이던 어느 날 새벽이었다 수백 미터 탄광 속에서 짐승처럼 두 눈을 부릅뜬 채 곡괭이질하는 얼굴이 떠올랐다 햇빛이 사라지고 얼어 버린 식물질이 땅속에 묻혀 열과 압력을 받아 광물질이 된 태백산 갱도 속으로 매일 밤 걸어 들어간 시커먼 얼굴이었다 따지고 보면, 시력 잃은 두 눈에 터질 듯한 통증과 고열에 시달리는 내 몸이 석탄계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나도 캄캄한 생활 속으로 걸어 들어가 단단한 빛을 캘 수 있을까? 이러저러한 설계도를 그려 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벌러덩 누운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때였다 머리맡 창 너머에서 어제의 사건 사고를 안고 뛰는 신문 배달부, 밤샘 근무 마치고 돌아오는 위층 아저씨, 우유 아줌마, 새벽 출근 발소리들이 가파른 골목길을 한바탕 흔들며 팽창하는 거였다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어제도 오늘도 부산한 저 소리들이 지질시대 광부 같아서 나도 암흑기를 받아들이고 골목 안으로 뛰어 들어가 발소리 높여야겠다 갖은 다짐이 장딴지에 불끈불끈 솟구칠 때 벌떡 일어나 이부자리를 개고 얼굴을 어루만져 보았다 소스란히 닮아 있었다 갱 속에서 차가운 도시락 비워 가며 삶의 암층이 켜켜이 쌓인 암벽을 깨고 간신히 빛을 발굴해 온 우리 아버지 얼굴을

 

 

 

 

# 손병걸 시인은 1967년 강원도 동해 출생으로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푸른 신호등>.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통증을 켜다>, <나는 한 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가 있다. 구상솟대문학상, 민들레문학상,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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