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애초 걸었던 길 - 류성훈

마루안 2021. 5. 18. 22:33

 

 

애초 걸었던 길 - 류성훈


봄이 너무 미끄러워서 그랬어요. 육절기가 골목을 저미는 사이, 갓 난 힘줄과 헌 힘줄 사이, 멸종 전의 계절 몇 가닥이 분별없이 솎아진다

굳어 갈수록 짙게 무르익는 피 냄새
눈 감아도 찾아갈 좁은 잎맥들이 소복한 거읏을 긁는다

너희는 집을 나서기 이전, 혹은 나설 집도 없던 아이들의 비릿한 연륜 속, 벗어나지 못할 불티 위에 열쇠를 꽂았다 애초 걷던 길을 밟고 밟는 바람에 따갑고 요란하게 물들 때 노란 스쿠터들이 뜨거운 기름 위에서 박식하게 여물어 간다

너희는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길들에 대해 말했고
갈 수밖에 없었던 길들에 대해 들어야 했으니
욕설 같은 날카로움으로
번듯한 흉터를 닮은 모습으로
의자 위에서 살아남은 잔뼈들이
분별없이 걸레질했다

술기운으로, 따뜻한 피 냄새 속에 우리는 만났다 아무도 막지 않았고 그곳의 해는 그치지 않을 것 같았다


*시집/ 보이저 1호에게/ 파란출판

 

 

 

 

 

오월 - 류성훈


혼이 베개에 묻을 만큼 오래 잠들고 싶던 날
나는 귓구멍에서 내 가려운 잠을 파낸다

모두 뭉근한 불 위에 누웠던 때가 언제였을까
한 이불에서 발을 뻗었을 때가 언제였을까
혼자 왔다가, 혼자가 아니었다가, 혼자가 아닌 줄 알았다가, 혼자가 아니고 싶다가, 결국 혼자가 되는 삶들을 건조대에 널던 오늘은 달과 지구의 공전 거리가 가장 멀었다
행성과 위성이 멀어도지고 가까워도진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가족이 살고 있었고

나는 어디에도 살고 있지 않았다
가족의 달에는 가족도, 가족 없는 희망도, 희망 없는 가족도 있으니 우리는 꼭 희망이 없이 살아도 나쁘진 않겠지 그것은 단어에 불과하고 오타에 가까울 테니
가령 살아,라고 쓰다 사랑,이라고 쳤을 때 언제든 어떻게든 삶은 실수이고 그래서 아름다워 보였듯이, 내가 글을 쓰는 게 다행인 때가 있었듯이

잠 속에서
잠 밖에서
또는 마지막 이승에서
더 많은 봄이 보고 싶었다


 

 

# 류성훈 시인은 1981년 부산 출생으로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보이저 1호에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