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 안의 당신께 - 박남준

마루안 2021. 5. 18. 22:18

 

 

내 안의 당신께 - 박남준


저문 강에 내린 마음으로 편지의 시작을 썼을 것이다
가슴을 뛰게 하는 연분홍을 숨기지 않겠다고도 했을까
빛나는 풍경의 가장 중심에 당신이 있었으면
그런 꿈을 꾸었지
당신의 눈동자에 사로잡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싶은 내 고백이었을 것이다
잠든 당신의 얼굴에 미소를 짓고
당신보다 먼저 눈을 떠 향기로운 찻물
올려놓고 싶은 욕심쯤은 부려보고 싶었던 것

내 어리석은 이마가 바닥에 닿을 수 있으니
절하겠습니다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다리가 있으니
절하겠습니다
두 손을 모아 기도할 수 있으니
절하겠습니다
삶의 간절함은 어디에서 오는지
비로소 눈먼 날들이 나를 여기 이끌었는지
살아 있으니 절합니다
내 안의 당신께 절합니다


*시집/ 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 걷는사람

 

 




절 - 박남준


푸른 바다가 들어와 머물기도 했지
발목을 빠져나간 늙은 양말이 눈에 밟히며
애써 이룬 수평을 흔들었다
젊고 뻔뻔한 후회가 스치며 혀를 깨물게도 했네
여기까지는 얼마나 흘러왔는가
지문을 찍듯 엎드려
낮고 겸손한 바닥을 몸에 새기는 것만이
절은 아닐 것이다
절은 할수록 절로 늘어
뼈마디마다 불꽃을 피우고
육탈 같은 다비가 일어나기도 한다
꽃잎의 주소를 따라가면 환해지고는 했지
강가에 나가 꽃배를 띄웠다
일상이 간절해야지
점점 작고 가벼워져
꽃배를 타고 건너가야지

 

 


# 박남준 시인은 1957년 전남 법성포 출생으로 전주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4년 <시인>지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풀여치의 노래>,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적막>,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중독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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