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저수지가 보이는 식당에서 잠시 - 허문태

마루안 2021. 5. 21. 21:28

 

 

저수지가 보이는 식당에서 잠시 - 허문태


잠시라는 것도 보인다는 것도 들판의 문제다.
어디서부터 흘러왔는지 어디로 흘러가는지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헤어졌는지
문득 들판의 문제다.
어느 봄날 민들레를 한없이 보고 있었던 것이,
노랑나비가 앉아 있는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냇물의 소리는 부딪치는 소리라서
나보다 맑다고 생각했다.
다 들판의 문제다 지금은
겨울 들판에서 저수지가 보였을 때 기러기는 저공비행을 한다.
저수지가 보이는 식당에서
서너 명씩 너덧 명씩 식탁에 둘러앉았다.
일인용 식탁은 없고 사인용 식탁에 혼자 식사하는 경우는 있다.
잠시 뭔가가 보일 때 얼른 봐두자.
꽃이 피는 곳은 어디고 나무는 어디로 걸어가는지,
나는 아직 늙어서
손에 굳은살이 두툼한 사람들과 식사를 한다.
괘종시계 초침 소리가 잠시 멈춘다.

 

 

*시집/ 배롱나무꽃이 까르르/ 리토피아

 

 

 

 

 

 

초록 - 허문태

 

 

기회라는 것이 반성이나 성찰을 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구동성으로 외친 초록

 

기회는 지천이다.

 

수십억이 수십억의 생각으로 작업복을 입는다.

 

어제 입었던 작업복을 다시 입는가 하면

깨끗한 작업복으로 매일 갈아입기도 하고

한 번 입은 작업복을 평생 입기도 하고

난생 처음 작업복을 받아들기도 하고

중요한 것은 작업복을 입으면 자꾸만 꿈을 꾸게 되는데

왜 푸른 꿈만 꾸게 되는 걸까?

 

초록은 초록으로 시작해서 초록으로 끝나지 않으므로

아직 바다빛이나 하늘빛이 아니다.

 

다 없었던 것으로 하고 갔던 길을 다시 가보라 한다.

초록으로 시작하여 빨강으로 끝나는 사과를 의심 없이 따라가야겠다.

몸에 딱 맞는 작업복이 좋다.

 

가끔 일손을 놓고 바다나 하늘을 쳐다보는 것은 오래된 습관이다.

 

 

 

 

# 허문태 (본명 허우범) 시인은 2014년 <리토피아>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달을 끌고 가는 사내>, <배롱나무꽃이 까르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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