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위험하다 스치기만 했는데 - 이기영

마루안 2021. 5. 21. 21:36

 

 

위험하다 스치기만 했는데 - 이기영

 

 

기를 쓰고 달아나는 걸 붙잡아

매달아 둔 발이었다

 

투명하지 않아서 상처 뒤는

더더욱 알 수 없고

 

빛의 행방을 쫓아 빨리 뛰어가는 심장이었다가

희미한 광기를 완성하면

비로소 반짝이는 눈물이었다가

난무하는 추측이었다가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을 숨기기 좋은 딱 그만큼의 달빛이

 

스친다는 건,

반쯤은 다른 타인으로 속수무책으로

지우고 싶은

지워지고 싶은 것들을 꺼내

눈먼 사람 몰래 흘리고 가는 것

그것은 차마,

나를 말할 수 없는 것

 

 

*시집/ 나는 어제처럼 말하고 너는 내일처럼 묻지/ 걷는사람

 

 

 

 

 

 

환절기 - 이기영

 

 

묶여 있는 개가 미동도 없이 바라보고 있는 곳에 나비가 난다

 

나비는 꽃이 일러 준 방향으로 날아가고

 

바람이 멋대로 동작을 바꾸면서 계속해서 나비를 흔들어도 그걸 춤이라고 묶여 있는 개는 상상한다 개를 묶고 있는 감나무는 늙은 개를 제 그림자라 착각한다

 

감또개를 수도 없이 떨어뜨린 늙은 감나무와 매일 늙어 가는 개와 봄 한철의 꽃 한 송이와 나비와 그리고 바람이 서로를 매만지면서 얼마나 지독하게 꿈틀대는지

 

소나기 지나가고 빨랫줄 물방울 하나가 진저리를 친다

 

그건 찰나,

 

맺혔다 사라진 공간을 쓰다듬는 건

매일 새롭게 식어 가는 태양뿐이다

 

 

 

 

# 이기영 시인은 전남 순천 출생으로 2013년 <열린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인생>, <나는 어제처럼 말하고 너는 내일처럼 묻지>가 있다. 2018년 김달진창원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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