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굽다 - 이강산
속병 덕분에 방 한 칸 얻어 떠나와
맵고 짠 욕망과 인연은 그만 끓이겠다며 잠근 불판 위에 시계를 올려놓고
깜박 침묵의 이불에 눕다 깨어보니
두 시 반이 아홉 시 반으로 익어버렸다
낮이 까맣게 타버렸다
방 가득,
공복의 마음 가득
시간의 누룽지 냄새가 매캐하다
타다 만 모퉁이 시간을 마저 굽고 긁어낸 누룽지가 지장암 석탑이다
백 년쯤 홀로 견딜 만하겠다
*시집/ 하모니카를 찾아서/ 천년의시작
멍게의 방 - 이강산
-살아있는 멍게 있습니다
4차선 횡단보도 곁, 깡마른 멍게 장수 사내의 목소리가 금방 구워낸 고구마 속처럼 뜨겁다
우수(雨水)의 밤이 염천이다
남도에서 예까지 맨발로 걸어온 듯
저 붉은 발가락들, 상처들, 모닥불처럼 끌어안고 견디는 객지의 하룻밤
저 횡단보도란
살아있는 호떡이며 살아있는 동태, 한때는 살아서 밤마다 서성대던 아버지까지 무수한 목숨들이 명멸했던
지상의 방 한 칸,
그 차디찬 주검의 구들에 누워 무사하려는지
떠나온 길을 기억만 한다면 사내 몰래 돌아갈 수 있으련만
사내는 분명 멍게의 추측보다 먼 길을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사내보다 멍게가 더 먼 길을 선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게 저를 살리고 사내를 살리는 길이라는 판단으로
그럼에도 나는 이쯤에서 유랑을 접고 숙면에 들었으면 싶다
장돌뱅이 괴나리봇짐을 내려놓고 아버지가 떠났듯
손에 쥔 것 그만 풀어놓았으면 싶다
그러면 이 방에 든 목숨들을 무심히 스쳐 간 인간들이
하나둘 다가와 허리를 굽힐 것인즉,
-통영 멍게 있습니다
발가락의 상처가 아물었는지 사내가 멍게의 방문을 활짝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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