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낙타는 어제의 지도를 허물면서 간다 - 신표균

마루안 2021. 2. 21. 19:21

 

 

낙타는 어제의 지도를 허물면서 간다 - 신표균 


나침반이 가리키지 못하는 사막의 길을 
내비게이션은 손짓할 수 있을까 

목마른 낙타 한 마리 
오아시스 찾아 사막 속을 간다 
눈썹에 매달리는 모래바람 
마른 울음으로 헤치며 발걸음 다시 내딛지만 

모래 속에 파묻힌 길이 
어디로 닿아있는지 돌아갈 길 막막한 
길 위에 서서 길을 묻는다 

날개 부딪히는 일 없을 철새 떼가 
날아가는 길 없는 그곳이나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의 눈엔 
지도가 없다 


*시집/ 일곱 번씩 일곱 번의 오늘/ 천년의시작 

 

 

 

 

 

 

자정의 종소리는 종종 징징거린다 - 신표균 


둥지도 무덤도 만들지 않는 눈먼 떠돌이 새들 
동물원 안에 갇힌 매의 노란 눈에 놀라 
검은 나비처럼 
내 과거를 매장해 놓은 언덕 위를 날아다닌다 

틀니 달그락거리는 소리 잦아든 귓속에서 
자라는 침묵 아버지는 발자국 소리 숨기지만

세에라자드의 밤을 향한 발걸음 땅에 닿지 않아 숨이 차다 

신데렐라의 자정은 왜 그렇게 조급한 건지 
역정이 입안에서 뿌리내리는 동안 
시계의 종소리는 세상 모든 시간을 깨뜨려 버릴 것처럼 
큰 소리로 징징댄다 

나무들 세상으로 내려서고 
나는 여자의 성기를 귀에 대고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머릿속은 오르가슴이 치받쳐 기형적인 생각들로 팽창해 
경전 속에 네 편지를 숨겨 베두인처럼 떠돌고 싶다 

밤비 추적추적 내리는 버스 정류장 
무명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마지막 버스를 기다린 
비의 창으로 차이콥스키의 비창이 들려오고 
한 척의 고독이 밤안개를 지나 도시의 불빛을 헤치며 

둥둥 떠가는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처럼 꼭 필요할 때 등장하는 

네 고독을 픽업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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