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까다로운 방문객 - 김점용

마루안 2021. 2. 18. 22:00

 

 

까다로운 방문객 - 김점용


묘지의 저녁이다
서둘러 청소를 할 시간
단청 꽃이 다 진 크고 낡은 집을
깨끗이 쓸고 또 닦아야 한다

어두워지면
발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집

오늘은 특별히 세 자매가 온다네
큰언니는 팔자를 그리며 나란한 무덤 두 개를 함께 돌자 그러고
둘째는 건넌방으로 사주를 보러 가자 자꾸 조르겠지
막내는 철없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할 거야
저... 저기요, 당신 신발이 없어졌어요
찾아주세요

무엇이 잘못됐는지
밤늦도록 불은 켜지지 않고
혼자 빈 구석방을 오래오래 문지르면
사라진 꽃신들이 고요히 돋아나지

살아 있는 듯
살아 있는 듯


*시집/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 걷는사람

 

 

 

 

 

 

비, 구름의 장화 - 김점용


밖에 좀 보거라
어젯밤에 너가부지가 마른 솔갱이를 한 짐 지고 안 왔드나
엊그제 커다란 솥단지에 쌀을 한가득 보냈으니 그 나무로 뜨신 밥을 해 드시라는
시끄럽다 이대로 날 태울라는 기지
비가 좀 와야 할 낀데
소낙비라도 한 줄금 오면 을매나 좋겠노
너가부지 가고 내 새암에다 모래를 꽉꽉 채았더니
용암덩어리가 안 됐나
나이 묵고 새암이 막 다 캐도
아홉 남매 뽑아낸 내력인데
칠 남매 아니고요
둘은 도로 안 처박았나 안직도 귀가 잉잉하구만
아들만 고집한 죄죠
밖에 좀 보거라
바람뿐이에요
웬 할망굴 하나 데리고 왔더만

깜장 보재기를 들고 졸졸 따라오는 걸 내 이래 본께
너가부지 나뭇짐 뒤로 숨데
새살림을 차렸나 보네요
날 싸갈라고 그라는가

아버지는 안 오실 거에요 거기서 여기는 양의 창자처럼 길이 꼬불꼬불해요

시끄럽다 저 앞산 꼭대기에 백두 천지나 태백 황지 물 좀 올려라 신령님네 정한수가 다 말랐을 성싶다

 

저그 저 앞산 우에 뜬 구름 장화만 벗기모 새암에도 물이 차서 새애기 하나 끼끗이 씻어낼 기다 죽은 니 누부가 될지 너가부지가 될지는 내도 잘 모른다만

 

 


*시인의 말

꼬박 3년을 앓았다.

지금까지 기도하고 격려하고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특히 삼척에서 서울까지 대관령을 서너 번 왕복해 주신 소설가 박문구 선생님께는 뭐라 드릴 말씀이 없다.

아내가 없었다면 이 시집은 나오지 못했다.

여보, 이 시집은 당신 거야. 고마워.

나도 이제 일어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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