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입춘 - 안상학

마루안 2021. 2. 5. 19:08

 

 

입춘 - 안상학


몸도 마음도 청춘이라고 생각했던 그때
나는 완전하게 죽었던 것이 분명하다
아무도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지나가고
누구도 내가 흘리는 눈물을 눈치 채지 못했다
나만 이 세상에서 나를 눕힐 방 한 칸 없는 것만 같고
세상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집이 있는 것만 같았다
어느 골목에서 바라보던 집들의 불빛은 딴 세상만 같았다
마음을 잃어버린 몸처럼 세상에서 나는 서러웠다

그때 내가 죽지 않았다면 그럴 리가 없었을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서로 눈을 맞추며 노래를 부르는 것만 같았고
내가 부르는 노래는 누구도 듣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나에겐 아무것도 없었고 남들은 뭐든 다 있는 것만 같았다
옷을 벗고 미친 듯이 뛰어다닌들 누구 하나 돌아볼 것 같지 않았다
몸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세상에서 나는 외로웠다

몸도 마음도 완전한 청춘이라고 생각했던 그때
나는 무덤보다 더 깊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봄이 오는 방식이 늘 그렇듯이 봄이 봄이 아닌 봄 속에서
나는 가슴속 남모르는 꽃 한 송이만 어루만지며
내겐 꽃 피고 질 춘삼월이 없을 것만 같은 날들을 살았다
몸도 마음도 잃어버린 사람처럼 세상에서 나는 살았다


*시집/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걷는사람

 

 

 



소등 - 안상학


앞집이 헐린 자리를
옆집에서 텃밭으로 만들곤 보안등을 꺼 버렸다
농작물도 잠을 자야 실한 열매 맺는다며
망종부터 상강까지는 그리 하겠다고 머리를 조아린 후였다
나는 아무런 내색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이며
우두커니 밤을 지새울 집을 걱정했다

복중 더위에 오랜만에 집에 들러
캄캄한 보안등 아래 깊이 잠든 화단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몇 해 전 옮겨 심은 작약이 아직 꽃을 피우지 않는 까닭도
보안등 불빛 아래 잠 못 이뤄 그런가 생각하다가 불현듯
내년에는 혹 꽃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러서는
더듬더듬 열쇠 구멍을 찾는 내 손길이
불을 켠 듯 다 환해지는 것이었다

 

 

 

 

# 안상학 시인은 1962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그대 무사한가>, <안동소주>, <오래된 엽서>, <아배 생각>,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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