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벼락처럼 온다 - 백인덕
담장 밖에서
밖으로만 그림자를 늘이는 나무는 안다.
몇 차례 돌팔매쯤 거뜬히 견디는
키 작은 관목조차 알고 있다.
시간은 철갑(鐵甲)을 둘러주거나 석회질 외투로
스스로 일어서는 것이 아님을.
밀어내는 힘과
억누르는 세상이 만났을 때
축축하고 질긴 외피로 자기 한계를 그을 때
금은 이내 상처가 되고
상처는 강이 되어
모든 뜻밖의 저녁 아래로 흐를 뿐이란 걸
시작은 언제나 벼락처럼 온다.
*시집/ 북극권의 어두운 밤/ 문학의전당
뼈아픈 근황 - 백인덕
서 있는 내내
번갈아 저리는 다리
두 눈 꼭 감고도
추억 하나에 집중하지 못해 무작정 내린
낯선 지명의 구도심
지하에도 지상에도 즐비한 곡(哭)소리
자진폐업, 임대문의, 점포정리, 핵폭탄세일의
반투명 유리벽을 유람하는데
순간 눈길을 확 당기는
붉고 정갈한 서체
-폭망,
서서히 사라지기보다 불타버리는 게 낫다는 듯
요절인 듯
절명인 듯
해 질 무렵 거리에 차가운 불을 뿜는다
저린 다리를 잊고
찬 불에 움츠러들어
폐업 직전의 정신을 곰곰 헤집어본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망각의 기술,
예상 표절
슬픈 눈빛으로 오가는 짐승들 사이
딱딱한 목 뒤에서 기어이 틀어지는
억센 뼈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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