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버지의 소꿉 - 정병근

마루안 2020. 11. 29. 19:34

 

 

아버지의 소꿉 - 정병근


아버지가 평생을 바친 놀이는
처음엔 농사를 팔아 밥을 만드는 놀이
-힘들기는 아이고 힘들어,
할배 할매도 한입 삼촌 고모도 한입
엄마도 우리도 한입

시내로 나온 아버지는 소꿉을 바꾸었다
과자와 사탕과 하드를 팔아 돈을 샀다
우리는 새 새끼들처럼 달게 받아먹었다
-어서어서 커야지.
아버지는 문 유리로 밖을 내다보며 가게 놀이에 몰두했다

-각시가 아파요.
아버지는 틈틈이 병원 놀이를 했다
혈압계와 미음 통과 호스 같은 소꿉들이 늘었다
흩어진 우리는 숨바꼭질에 빠졌다
-얘들아, 엄마가 죽었단다.
우리는 손님이 되어 아버지의 각시를 조문했다

아무도 없는 아버지는 환자 놀이에 몰두했다
-밥도 내가 먹고 잠도 내가 자는 거야.
아버지가 죽었다
안동포 수의에 검은 유건을 쓴 아버지는
제사 놀이에 빠졌는지 영 대답이 없었다

아버지를 불태우고 빈집에 들렀다
-조화(造花)는 안 시들어서 좋다.
가게 안에는 매화와 학이 앉은 소나무 조화 화분이 다섯 개
과자 몇 봉지와 술 몇 병이 눈을 반짝였다

-담배 한 갑 주세요. 소주도 한 병 주세요.
문을 드르륵 열고 나오면 좋겠다
당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귀한 손님들이 왔으니
그릇과 숟가락과 냉장고와 밥통과 판상을 내놓으세요
저 어린 소꿉들을 그만 내놓으세요


*시집/ 눈과 도끼/ 천년의시작

 

 

 



엄마는 간다 - 정병근


광주리에 뙤약볕을 이고
갔고 등 뒤로 밭고랑을 밀며
갔고 베틀에 앉아 삼베를 짜며
갔고 철솥에 김을 펄펄 피우며
갔고 점방 마루에 앉아 꾸벅꾸벅 졸면서
갔다

부지런히, 참 멀리 갔다
어린 우리를 보듬고 찍은
흑백사진 속 엄마도 멀리 갔다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바람풍으로 캄캄하게 누워
냄새로 우거지다가 무섭게 무섭게
활활 타며 엄마는 갔다

엄마는 가는 사람
내 죄를 다 뒤집어쓰고 가는 사람
가고 난 뒤에 비로소 없는 사람
엄마는, 다 끝나고
식후 30분처럼 쓸쓸한 이름

가파르고 어긋난 내 속도로는
엄마 간 곳에 다다를 수 없어
아무리 생각을 멀리 멀리 달려가도
나의 엄마 최, 춘, 자 씨는
참 안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