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타원에 가까운 - 강혜빈

마루안 2020. 9. 22. 22:31

 

 

타원에 가까운 - 강혜빈 
​ 

정원을 반 바퀴 도는 데 두 계절 
​ 
당분간 입에서 풀냄새가 나도 괜찮니? 
잘 봐, 기대와 실망을 한 군데에 심으면 얼마나 잘 자라는지 
무른 말에도 잘 베이는 나뭇잎들은 어떻게 초록인지 
​ 
구멍 난 하루를 걸치고 나서는 산책 
흰 조랑말들의 발자국이 만든 밤은 길었어 
나와 친해진 것들은 하나같이 
어두운 곳에서 잘 얼었지 
​ 
뾰족한 얼음들을 재워놓고 
내가 나인 것을 참아보기로 했어 
칭찬을 한 잔 마시고 싶거든 
기다란 혀를 감추고 정확하게 웃어봐 
​ 
너의 끝과 나의 끝은 일직선으로 달라질 수 있어 
너무 넓어서 슬픈 정원은 형용사가 될 수 있어 
이별은 한 마디의 음절만 가질 수 있어 
​ 
우리를 한 군데에 심으면 누구부터 시들까? 
아무렇게나 자란 마음에게는 차가운 물이 좋아 
소심한 게 아니라 섬세한 거야 
같은 시옷인데 우는 얼굴이 더 깨끗하지 
​ 
너를 절반만 이해하는 데 네 계절 
​ 
나의 위와 너의 아래를 묶고 기다리자 
완전한 우리가 될 때까지 
우리의 애칭은 늘 그런 식이지 
잡초. 멍청이. 잡초. 돌연변이. 


*시집/ 밤의 팔레트/ 문학과지성 


 

 

 


바깥의 사과 - 강혜빈 


꿈이 나를 갉아먹을 때 엄마, 엄마를 부르지만 
나와 나의 커다란 
괘종시계만이 살아 있는 이곳 

시계추는 거실을 서성이며 살 타는 냄새를 풍기고 

발들이 반복되는 계단을 번복하는 소리 
저녁의 목구멍이 팽팽하게 잠겨오는 소리 
흑흑, 흑흑, 눈에 박힌 태엽이 잘 감기지 않는 소리 

태연히 몸속을 건너가는 엄마, 엄마를 부르지만 
나와 나의 투명한 
팔다리가 상상한 모습이 아니어서 그랬니 

문이 혼자서 열린다면 안녕, 너도 내가 보이니 

물을 뚝뚝 흘리면서 널려 있는 이웃들 
발바닥을 내놓고 말라가는 바지들 
머리카락을 한 올 두 올 뜯어 먹으며 커지는 개미들 

아냐, 한눈에 알아보는 건 가짜 가족 
우리는 늘 액자 속에서만 창백하고 검었는데 
이불의 겉과 속은 덮는 사람이 정하는 것 
썩은 껍질들처럼 

자다가 울면 잠꼬대처럼 넘어갈 수 있으니까 
그런 얼굴로 나를 기다리면 못써 
누구라도 목소리를 따라할 수 있으니까 

아냐, 우리는 아직 아무도 입지 않은 옷 
밀려난 얼굴 위로 똑같은 얼굴이 겹쳐진다면 
어젯밤 누군가 성냥 한 개비를 던졌기 때문에 
잠 속에서 몸집이 커다래진 시간은 깨어나지 않아 

그렇다고 아주 살아 있는 것도 아닌 
문고리는 곧 살금살금 돌아갈 테지만 

 

 

 


# 강혜빈 시인은 1993년 경기도 성남 출생으로 서일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16년 <문학과사회>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했다. <밤의 팔레트>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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