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파란 달 - 이운진

마루안 2020. 9. 8. 22:28

 

 

파란 달 - 이운진


기억을 허문다

내가 온갖 죄를 지은 저 아름다운 시절과
돌림병 같던 청춘을 헐어서
기억으로도 돌아갈 곳이 없어졌으면 하고

어느 날 내가
당신을 처음 알던 백일홍 나무 아래 서 있을 때
갓 핀 꽃송이가 먼저 알고 반겨도
나는 처음인 듯 슬펐으면

가장 어두운 눈 속에서
가장 밝은 당신이 사라질 때
한 날에서 다른 날로 옮겨 가듯
무심히 아팠으면

얼굴이 없는 나를 만났을 때도
밤보다 깊은 문장을 잃었을 때도
눈만 가만히 감았다 뜬 채,

지나간 시간을 허무는
그런 밤에는
눈물이 울다 간 자리에
파란 달이 뜬다


*시집/ 톨스토이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 천년의시작

 

 

 

 

 

옛 일기장을 찢으며 - 이운진


서랍 속에서 낡아버린 일기장을 읽다가 찢어버린다

젊음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초라한 청춘과
본능보다 강한 상처의 기억들
다시는 만나지 않기 위해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나를 찢는다

스무 살의 나는 외롭고
스물한 살의 나는 울고
스물넷의 나는 지옥에 있었다

나는 나를 어떻게 부숴야 하나
내 영혼의 사슬을 감으며 쓴
붉은 눈물들

기도하던 손이 찢기고
웃음만큼 억지스러운 희밍이 찢기고
오래 사모했던 이름이 갈가리 찢긴다

양심으로는 깨지지 않는 세상의 벽과
신도 돕지 못한 사랑 때문에
속절없던 그때

나의 비명의 별들은 얼마나 비틀거렸을까
바람의 가냘픈 자장가가 어떻게 나를 달랬을까

가슴이 미워했던 일을
시간은 어떻게 잊게 하는지
한때는 숨결이었던 글들을 찢으며 나는 생각한다

슬픔은
나의 한창때였다고


 

 

 

*시인의 말

시간은 모든 것을 침전시킨다.
그래서 삶의 표면은 깨끗한 슬픔으로 보이기도 한다.
지금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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