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몸의 명상 - 백무산

마루안 2020. 9. 7. 22:09

 

 

몸의 명상 - 백무산


이렇게 한심한 날에도 배는 고파 뭘
먹을까 이리저리 머리 굴리고
이렇게 슬픈 날에도 죽은 자 앞에서
갈비탕에 수육 접시 맛있게 비우고

이렇게 개 같은 날에도 좀 전에 배불리 먹은 밥은
간데없고 뭘 먹지 식당 골목을 기웃거리고
종일 한 일이라곤 지워버려야 할 일과
밥 먹은 일밖에 없는 날에도

절박함에 답을 찾아야 할 머리에는
식욕이라는 김이 뿌옇게 서려오고
먹는 일 때문에 통증도 무디어지고
머리에 끓어오르던 피는 위장으로 콸콸 흘러가고
아무리 유치해져도 다 그런 거지 뭐가 되고

그 유치함이 고뇌를 웃기게 만들고
허기가 저 높은 곳을 슬슬 비웃고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식욕인 것인지
식욕의 신전에 하루 서너번 머리 조아리고

슬픔의 끝에서 몸이 분해되다가도
고뇌의 회로에 갇혀 과열되다가도
신성의 불길에 영혼이 재가 되다가도
귀가를 종용하네 땅으로 땅에서 난 것으로
땅이 만들어낸 피와 살로 버무리네 온갖
부서지고 썩은 것들로 지은 집으로


*시집/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창비

 

 

 

 

 

 

무무소유 - 백무산


굶주리는 사람이 건강 단식을 어떻게 이해하나
없는 사람이 무소유를 어떻게 이해하나

잃을 것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잃을 것은 사슬뿐인 사람들은
자유를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날 거라지만
그들도 잃을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지
가진 것 아무것도 없는 거지는 동냥 구역을 잃을 게 있지
없을수록 집착할 수밖에

거액의 자산가가 방송에 나와 무소유의 자유로움에 대해
진지한 표현으로 말할 때 그건 분명 진심이었을 거다
무소유의 청빈함을 제대로 글로 쓰는 작가는 좀 살 만한 자다
어디 가나 밥과 집이 넉넉한 스님이라야
무소유를 제대로 설법할 수 있다

무소유는 가진 뒤의 자유다
무소유는 소유라는 단어가 있은 뒤 조합된 낱말이다
다 내려놓은 사람의 무소유는 이미 그 낱말이 아니다

가진 것이 넉넉해야 무소유를 맘껏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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