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망각 - 조성국

마루안 2020. 9. 8. 22:21

 

 

망각 - 조성국 


자기공명단층촬영 필름에 새겨지듯 
왼쪽 측두엽과 후두엽의 일부가 깨져 
하야한 녹처럼 부종이 슬었다 
말투 어눌하고 기억도 
아렴풋해서 생각이 안 났지만 기억이란 그렇다 
깨진 기왓장 가루 빻아 
포름히 녹슨 놋그릇 
짚수세미로 문질러 닦으면 
번쩍번쩍 광이 슬어 얼굴 얼비치듯이 
아무것도 잊히지 않는 기억의 처방약 
장기간 복용해 
생생하게 살아날 수 있는 것, 
신경외과 의사 치유 용법대로 되살아날 수 있는 것이라면 
한 가지 
단 한 가지만, 
일테면 설령 누군가 그 한 가지에 대해 말을 꺼내더라도 
처음 듣는 이야기마냥 귀가 쫑긋해지는 것 
이것에 대해서만 
기억나지 않았으면 했다 
밝고 빛나는 기억의 저편에 탁하고 추하고 속악한 것 
내가 척지고 등 돌리고 원수졌던 것 
되살아나지 않았으면 하였다 


*시집/ 나만 멀쩡해서 미안해/ 문학수첩 

 

 

 

 



상중(喪中) - 조성국 


달밥 

아무래도 오늘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다고 
연락이 오더니 넋 나간 듯 아버지 
혼자 울고 계시고 
축 처진 심장 맥박이나 산소 호흡량 보며 
삭신이란 삭신은 다 주물러 드렸더니 화색이 돌았다 
발가락도 꼼지락거려 
한 서너 나날은 너끈히 견디겠다기에 
곡기 끊고 
버티시겠다 하기에 잠깐 학교운영위원회의 갔다 오고 
늦저녁의 조촐한 내 생일 밥 한술 뜨는데 
그만 운명하셨단다 유언이나 
유서도 없이 지켜보는 식구도 없이 혼자 
가는 길 배웅도 못 했다고 아버지는 또 까마귀처럼 울고 
종작없이 요양 병실에 하도나 누워 계신 터라 
등짝이 된통 짓무른 채 
늘 먼산바라기 하던 눈동자 단정히 감으시다가 
허기가 일었는지 틀니 빠진 움푹한 입시울을 보름같이 
둥그스름 발리는 것을 
나는 지상의 마지막 밥술인 양 
들창의 검은 휘장을 거둬 내며 달빛으로나 떠먹여 드렸으니 
만재한 어머니의 먼 길 조금은 환하겠다 


흙밥 

어딜 가신다요 승무 고깔 
하얗게 쓰고 분 바르고 홍지 
곤지 찍듯 홍화빛 입술연지 곱게 바르고 
황포 삼베 모시옷 잘 차려입고 어딜 
가신다요 아버지 몰래 
어디에다 숨겨 둔 남정네라도 있었습디여 
평소 안 하던 분 단장에다 
옷매무시 오롯이 가다듬고 
처녀 적 사진보담 더 요요하게 차리고 어딜 
가신다요 나한텐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는 상처 
누구한테도 주지 말라고 해 놓고선 
이퉁 부리듯 구멍이 숭숭 뚫린 제 허리등뼈 
뉠 방 한 칸 없다는 듯이 
제일 편하고 알맞은 수평 자세로 
칠성판에도 누워 보고 그렇게 반듯이 땅속으로 
파고들어 간 오동나무 방 한 칸 
그리도 좋아 보였습디여 울긋불긋 펄럭이는 만장 
앞장세우고 꽃상여 타고 간께 
호강이라도 부린다고 생각했습디여 여태까지 
무르팍 닳게 흙만 파묵고 살았응께 
인자 흙밥이라도 되러 가셨습디여 


돌밥 

칠칠재 끝나고 
햇묏등 곁에 빙 둘러앉아 밥을 먹는데 

무심코 산소 아래 
허리 굽은 황토밭 고구마 캐는 아낙이 눈에 띄어 
같이 밥 먹자고 청하였더니 
몇 번 극구 마다하다 따라나선다 

흙 묻은 손 탈탈 털고 
머릿수건 벗어 이마의 땀 훔치던 
나보다 한 살 어린 귀밑머리 어여쁜 아버지의 여자가 
두레밥상에 같이 앉아 
밥 먹는 것 같아서 
물끄러미 봉분 한 번 더 쳐다보았다 


묏밥 

칡뿌랭이가 묏자리 속으로 파고든 줄 알았다 

파인 맷돼지의 발자국 흔적이 어지럽게 흩어져 집게덫 놓고 
돼지목매도 쳤다 

파묘된 봉분이 봉긋이 복구례(復仇例)되니 
이런, 

어머니가 주린 산짐승에게 젖부리를 내밀었단 생각이 드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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