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불과, 혹은 - 정훈교

마루안 2020. 8. 21. 19:35

 

 

불과, 혹은 - 정훈교


몇 번의 침묵이 흘렀다

마흔 또는 그 고비에 이르러
죽은 그림자를 낙타는 부둥켜안았다

강으로 떠내려간 이름과
흰 벽을 타고 오른 이름과
초성 두어 개 떨어져 나간 녹슨 이름을
부둥켜안고, 그가 들어섰다

모두가 바람벽이라고 한, 그
몇 해 동안 그는, 녹슨 이름을 훈장처럼
부둥켜안고, 살았다.

그 누구도 그의 이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발설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고, 잊어서도 안 되는 이름이었다, 극성이 유난히 빛나는 삼경(三更)에도 그의 이름은, 암호처럼 어두웠다

그는 겨울 동백을 아들처럼 품고,
살았다, 산 자는 말이 없었고 죽은 자는 역사로 살아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낙타는 빈 들판에 서서
다리가 잘려 나간 이름 몇 개를 태웠다
그리고,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마흔 번의 봄을 지나

녹슨 울음을 삼키는
오늘, 고비에 이르러


*시집/ 나는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 시인보호구역

 

 

 

 

 

아홉 달 된 아이 - 정훈교


아홉 달 된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죽은 아이는 푸른 별에서 건너왔다고 했다
그 별에선 모든 것이 너무나 가벼워 이름을 함부로 짓지 않는다고 했다

심지어 땅에는 다이아몬드가 지천이어서
아이도 왕도 꿈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다

방황을 멈추는 일 중의 하나가 오늘처럼 지구별에 오는 것이라고 했다

또 하나는
계속 가벼워지다가
블랙홀로 스며드는 일이라고 했다

블랙홀은
덧셈과 뺄셈, 나눗셈이 복잡한 함수로 얽힌 곳이라고 했고
달이 뜨다가도 갑자기 새벽이 오는 곳이며,
죽은 아이도 이미 두 번이나 다녀온 곳이라고 했다

나선형의 어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조사 하나까지 뱉어 버리는, 낙태의 결정판 같은 곳이라
다들 꺼린다고 했다

형체들은 모두 블랙홀로 빨려갔고, 벌써 1억 광년도 더 지난 일이라고 했다
가벼워지지 않으려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이
너무나 서러워서,

가장 먼저 이 별에 온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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