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處暑) - 류정환
꽃피던 날들이 언제였던가,
뜨겁던 여름날도 어느새 다 지나갔구나,
바람이 벌써 어제하고 다르네, 중얼거리며
쓸쓸한 기운을 털어내는 아침
놀랍게도, 밥상머리에 앉은 아들이 대꾸를 한다.
"오늘이 처서잖아요."
"니가 처서를 다 알아?"
"모기 입이 돌아간다는...."
올여름엔 구경도 못 한 모기까지 들먹이다니
제법이다. 땅에선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오고
하늘에선 뭉게구름 타고 온다더니
올해 처서는 갓 스무 살 지난
아들의 말끝에 묻어서 왔다.
좋은 날이다, 꽃피는 시절은 지나간 게 아니라
아들놈 얼굴로 옮겨간 거로구나!
입춘. 청명, 하지, 처서, 모든 날들은
한 밥상에 뒤엉켜 있는 거로구나!
천기(天氣)가 크게 바뀌는 때.
쉰다섯의 또 한 절기를 돌아가며
여름의 뒷모습처럼 꽁지가 허전한 중에도
기꺼운 미소가 조용히 피어나는 아침.
*시집/ 말도 안 되는/ 도서출판 고두미
그늘에 대하여 - 류정환
그늘은 나의 운명, 나는
안나비 응달말*에서 태어났지.
울타리를 넘어온 아랫집 감나무, 그 푸진 그늘 속에서
끼니를 에우듯 감꽃을 세며 어린 시절을 때웠지.
세상은 양달과 응달로 나뉘었구나.
그늘은 스스로 넓어지는 세계가 아니구나, 그걸 그때 알았지.
헛간 같은 집을 버리고 도회지로 떠날 때
고향은 긴 산그늘을 한 보따리 싸서 들려 주었지.
삐죽삐죽 벼랑같이 솟은 아파트 숲에도 그늘은 깊어
햇볕이 궁할 때마다 그늘을 팔아 근근 목숨을 이어 가지.
그늘을 파는 일은 삼 대째 가업, 그걸 아는지
이 그늘 저 그늘 전전하며 사는 걸 속속들이 아는지
사장님 별고 없으시오, 안부를 물으며
사람들은 그늘그늘 웃지.
해도 달도 없이 그늘이 희미할 때,
내일 해가 또 다시 뜨려나
한 치 앞을 알 수 없어 갑갑할 때
나는 11월 바람처럼 미쳐 날뛰는데
그럴 때마다 그늘같이 저만큼 둘러서서
사람들은 그늘그늘 웃지.
그늘은 나의 운명, 달의 뒷면같이 알 듯 모를 듯한
목줄, 그 길이만큼 맴도는 가축마냥
되잖은 희로애락이 다 그늘 안의 일이지.
*충북 보은군 탄무면 매화리 1구는 '나비'라고 불린다. 야트막한 고개를 사이에 두고 안나비와 바깥나비로 나뉘고, 안나비는 양달말과 응달말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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